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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속모임] 내어주고 기대면서 맞물린 희생의 그물망 본문

여성들의 함께 말하기/꿈의 속삭임

[꿈속모임] 내어주고 기대면서 맞물린 희생의 그물망

고래의노래 2019. 6. 27. 14:53

 '사람이 날아다니고 물이 거꾸로 흐르는 곳 ' 8~9장에서는 자각몽과 원형을 통해 꿈이 어떠한 의미인지 살펴봅니다. 이전에 읽었던 책, '정신치료와 꿈의 힘'은 꿈 속에서 적극적으로 갈등상황에 대처하는 것이 현실에서의 문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더 연구해볼 과제라고 남겨두었는데요, 이 챕터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과 같습니다.

 

 서구에서 자각몽을 인지하게 된 것은 1800년대 후반이지만, 동양에서는 일찌감치 자각몽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죽은 영혼들이 꾸는 꿈을 바르도라고 합니다. 바르도에서는 내면의 억눌렸던 측면이 마귀로 나타나 위협하는데, 많이 억눌렀을수록 더 무서운 마귀로 나온다고 하네요. 이것은 자기자신으로 살지못한 인과응보의 판결을 스스로 내리는 것입니다. 영혼은 두려움을 느끼며 마귀를 피할 곳을 찾는데, 유일한 피난처가 짝짓기 중인 생명체 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갇히게 되면 다시 환생하게 되는 거지요. 반대로 바르도 마귀가 내가 품어내지 못한 안타까운 부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면 신성과의 완전한 만남의 문이 열리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석가모니는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모든 고통과 번뇌, 유혹이 실체가 아닌 내면의 허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악마의 시험에 들지 않으면서(무사히 통과한 것이 아니라) 신성과의 합일에 이르지요.

 

 죽음 후의 상황은 마치 꿈과 같기에 자각몽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수행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자각몽에서의 의식적인 대응에 대해서는 실제 문제의 근원이 아닌 증상만을 건드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꿈을 조절하는 것은 꿈이 가져오는 메세지의 효과를 막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자각몽은 꿈을 통제하는 것이 라니라 전일성을 바라는 꿈의 에너지와 완전히 협력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꿈작업으로 '아하!'의 경험이 쌓이면 실제 삶에서도 '습관적인 직관'이 일어나게 된다고 이야기하지요.

 

 모든 것의 실체를 깨닫는 열반의 순간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환생을 선택하는 '자기희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신성과의 합일보다 더 높은 소명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선택으로 환생한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보살, 티베트 불교에서는 달라이라마, 카르마나파,린포체 등으로 부릅니다. 기독교에서도 십자가에서 처형된 그리스도가 자기희생의 원형을 드러내지요. 이런 자기희생 원형 안에서 개인의 심리영성적 성장과 인류의 구원이 연결됩니다.

 

 인류의 집단 무의식속에 있는 본능적 행동유형 에너지인 원형은 개인의 성장과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개인이 꿈을 통해 원형의 표현을 만나 내면의 진화를 이루게 되면 인류 전체가 그 원형을 볼 수 있는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은 원형 자체의 변화는 아닐 수 있지만 서로간에 영향을 주는 패턴이 변하는 것으로 발전의 일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원형을 나에게 연결된 거대한 에너지이며 나는 그 영향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개인의식의 변화가 인류 원형 에너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나를 치유하는 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며 인류의 에너지장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던 '여성의몸, 여성의 지혜'에서의 구절도 떠올랐어요.

 

 

 위 영상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티베트 불교 고승의 환생인 린포체 소년과 그를 돌보는 노스승의 이야기예요. 린포체로서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소년은 전생의 장소로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소년이 수행을 할 절을 찾는 여정의 마지막까지 노스승은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린포체 소년과 함께 합니다.  '자기희생'으로 환생한 린포체를 노스승이 '자기희생'으로 돌보지요. 영화 마지막에 소년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노스승을 모시겠다고 이야기해요. 그 때쯤이면 노스승은 '돌봄이 필요한 아이'처럼 소년에게 기댈 것입니다.

 

 굳이 환생을 떠올리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 모임벗께서는 '자발적인 희생'이라는 단어에서 자연스럽게 엄마가 떠올랐다고 하셨어요. 끝없이 내어주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엄마가 답답하고 화가 났었는데 '자발적인 희생'이 인류의 구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구절에서, 허무해 보였던 엄마의 희생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꿈을 의식하고 떠올리면서 꿈 속에서의 우리 모습은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나를 위협하는 대상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시원하게 응징했고 해야만 한다고 여겼던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내 안의 나약한 부분을 보살폈고, 상황을 힘없이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했습니다. 마치 야곱이 하느님과 끈질기게 씨름한 끝에 축복을 받아내면서 신이라는 원형과의 관계에서 인류가 수동성을 탈피한 것과 같았습니다. 저자는 자기희생은 내가 더 큰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선택이며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중독되어 있던 내면의 패턴을 벗어나고 자아감을 희생하면서 원형적 에너지를 삶으로 구체화하게 되는 거죠. 내 모든 경험이 원형적 에너지들이 구체화되는 장이라면 나의 변화가 집단무의식에 울림을 줄 수도 있을 겁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우리는 지구상의 무든 생명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쥐고 매일 행사하고 있다. 살아남으려면, 원자의 구조나 별의 구성을 아는 것만큼 우리 무의식의 깊이와 창조적인 가능성에 대해 배울 필요가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구절은 저에게 '코스모스'라는 책의 마지막 구절을 연상하게 했어요. "인류는 우주 한구석의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성장했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되었다...우리는 종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오늘은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한 책은 무의식으로의 탐험을, 다른 한 책은 우주로의 탐험을 말하지만 결국 이 모두는 우리를 살리고 연결합니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책의 옮긴이는 별을 공부하던 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창조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시네요. 옮긴이의 글에 보면 '껍데기로 헤매며 살고 있을 때' 이 책의 번역이 생의 과제처럼 주어졌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지막 문장을 번역하시면서는 마음에 큰 울림이 있지 않으셨을까요. 밤하늘를 올려다보다가 내 안의 우주로 눈을 돌리고 혼란스러울 때 그 혼란을 풀어내며 이 책을 번역하셨으리라 생각하니 책의 저자와 번역자,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읽은 우리까지 인류의 진화라는 하나의 긴 과정 안에서 함께 손잡은 느낌입니다.

 

 서로의 희생으로 맞물려 우리가 살아갑니다. 사실 우리가 온전한 내면의 통합을 이루어서 모두가 스스로 바로 선다면 그 때는 아무도 희생할 일이 없겠지요. 그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지금 나에게 기댄 누군가 그리고 내가 기댄 누군가와 다정히 함께 하는 그 마음 자체로도 이미 충만한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꿈에 관한 두 권의 책을 마무리하고 꿈작업만을 위한 특별한 2주의 만남을 갖습니다. 꿈에 대해 배우고, 꿈을 돌아보며 우리는 놀라운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내어주신 마음에 기대고 기대어주신 그 믿음에 감사하면서 함께 꿈을 조금 더 탐험해보아요. ^^

 

* <꿈의 속삭임>은 책을 함께 읽으며 꿈에 대한 앎의 지평을 넓히고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며 무의식의 메세지에 귀기울여 보는 10주간의 그룹꿈작업 모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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