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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X 여성] 홀레 아주머니와 함께한 2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 X 여성] 홀레 아주머니와 함께한 2주차

고래의노래 2022. 4. 1. 23:13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여덟번째 주인공은 홀레 아주머니입니다. 홀레 아주머니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2기가 진행중입니다.

 

[죽었다가 삶으로 떠오르는 해의 소녀]

 착한 소녀는 고된 작업으로 피가 묻어버린 물레를 씻으려 우물에 몸을 숙이다 물레를 떨어뜨린다. 물레를 찾으러 우물 속으로 들어가보니 아름다운 들판이 나왔고 가마에 담긴 빵과 나무에 달린 사과의 청을 들어주며 홀레아주머니의 집에 이른다. 소녀는 홀레아주머니의 집안일을 도와주며 아주머니와 함께 머문 후에 황금비를 맞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착한 소녀의 여정은 해의 움직임과 대응한다. 해는 어둠이 몰려오자 피빛 노을을 남기며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뜨거운 가마같은 여름과 결실의 계절 가을을 지나 다시금 떠오른다. 우물 속에서의 시간은 해가 지고 다음 날 아침 다시 떠오르기까지의 시간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가마와 사과나무의 상징으로 볼 때 1년의 시간에 대응해보는 것이 더 들어맞는다. 태양은 해가 가장 긴 하지부터 기세가 꺽이고 가장 어두운 동지부터는 다시금 서서히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새엄마의 못생긴 딸도 착한 소녀의 이야기를 듣고 우물에 물레를 던지고 떨어진다. 그 소녀도 홀레 아주머니를 만나고 일을 도와주며 머물지만 시간이 갈수록 게으름을 피운다. 그리하여 다시 집에 돌아가는 길에 소녀는 황금대신 역청비를 맞게 된다. 못생긴 소녀의 여정은 달과 대응한다. 달은 처음에는 보름달로 환하게 세상을 밝히지만 점점 그 빛이 줄어 나중에는 완전히 게을러진다. 이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홀레 아주머니는 대지의 여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삶과 죽음의 주재자이며 해에게 황금빛을 선사하고 달에게 어둠을 내린 장본인이다. 

 서쪽에서 맞는 죽음이 완전한 종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해의 운명은, 악의 가혹함 속에서 어떻게 선이 지켜질 수 있는지를 인류에게 알려준다. '지금' 겪는 부당한 고난은 '시간'을 지나 '황금'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올 한 해 절기의 흐름을 따라가보기로 마음먹고 2주마다 돌아오는 절기를 챙기며 절기에 대해 조금 공부하다가 새로운 걸 알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동지를 24절기 중 가장 큰 명절로 여겼다는 것이다. 밤이 가장 길어 해가 죽은 듯이 보이지만 실은 동지를 기점으로 죽었던 해가 다시 살아나기 때문이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가장 희망적으로 바라본 그 시선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대에게 닥치는 모든 일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결국 그대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리라.
다만 스스로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언제나 충실하라. 그대의 본질을 유지하라."


 모두가 차별없이 존중되는 '마땅한 사회정의'가 너무나 더디오는 것만 같아 괴로워서 '비통한 자들의 정치학'이라는 책모임을 연 적이 있다. 그 책에서는 당위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품고 견디는 이들을 '마음이 부서진 이들, 비통한 자들'로 지칭하고 그들에게 민주주의의 찬란함을 꽃피울 힘이 있다고 격려하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조급함을 벗어나 기다릴 수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믿었던 정의' 앞에서 좌절하는 건, 삶이라는 유한한 시간 안에서 선과 악이 온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자연세계의 정의는 느긋하다. 칼 융의 수제자인 마리아 폰 프란츠는 남성적 정의에 대비되는 여성적 정의 원리가 있다고 말했다. 남성적 정의는 사회적 처벌, 곧 법치적 정의인 반면 여성적 정의는 오래 지속된 잘못된 태도가 신경증이 되고 일상의 습관이 질병을 만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결과로서의 정의'라는 것이다. 뿌린 씨앗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나 그건 '뜨거운 무쇠신발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방식이 아니라 '떨어지지 않는 어두움이 내면에 번진' 방식일 것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어 세상을 바라보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비통한 지금의 내 모습을 견디며 나에게 충실하기란, 시간을 믿고 세상의 근원적 선함을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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