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1 [에스테르기]
크세르크세스 대왕 통치 시절, 유다인들이 포로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다. 모르도카이는 내시들이 임금을 해치려고 계획을 세우고 있는걸 알아채고 이를 임금에게 보고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궁정사람 하만의 분노를 산다. 궁정 2인자 하만은 모르도카이와 유다인들을 해치고자 기회를 엿보게 된다.
크세르크세스 임금은 대신들과 시종들을 위한 성대한 잔치를 열고 흥을 돋우기 위해 와스티 왕비를 데려오게 한다. 왕비의 아름다움을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 와스티 왕비는 보기 드문 행동을 보이는데, 왕의 분부를 거역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신들은 이 일이 백성들 귀에 들어가면 부녀자들이 남편들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므로 왕비를 폐위하고 새 왕비를 세울것을 왕에게 권고한다. 남성들에 의한 대상화를 거부한 와스티 왕비의 행동은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기위한 페미니스트의 저항으로 보기에 충분하다. 구약성경에서 여성들의 이러한 전복적인 태도가 보여진 것은 처음이다. 너무 반가웠다. 그러나 정작 이 논란의 중심에 선 와스티 왕비 본인의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
와스티 왕비가 폐위되고 새로운 왕비로 모르도카이의 조카인 에스테르가 왕비가 된다. 이 때 하만은 궁정 2인자로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임금은 궁정의 모든 이들이 하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해야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모르도카이만은 그를 앞에 두고도 무릎을 꿇지도 절을 하지도 않았다. 이에 분개한 하만은 유다인들을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유다인들이 자신들만의 법도를 따르며 임금의 명령을 배척해 왕국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임금을 선동한 것이다. 그리하여 아다르달 열나흗날에(유대력으로 아다르달은 2~3월 사이) 유다인을 죽이라는 문서가 각 주와 모든 민족들에게 공포된다. 나치의 유대민족 학살이 연상되는 민족 학살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을 섬기겠다는 마음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은 세계 어디에서나 억압과 학대, 처형을 불러온다. 인간이 부릴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은 오직 몸을 가져가는 것 뿐이므로.
이를 알게 된 모르도카이가 에스테르에게 임금 앞에 나아가 민족을 위해 이 명령을 멈추게 할 것을 부탁한다. 에스테르는 처음에 두려움에 떤다. 임금이 부르기 전에 감히 임금을 뵈러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왕을 찾아가서는 왕 앞에서 실신하고 말지만 하느님께서 임금의 영을 부드럽게 바꾸어놓아 에스테르를 안으며 말을 들어준다. 에스테르는 연회를 준비할테니 하만과 임금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날 밤 임금은 궁정의 사건기록지를 읽다가 모르도카이가 임금을 해치려한 이들을 고발하였다는 기록을 읽고 그를 영예롭게 하고자 하만에게 방법을 묻는다. 하만은 그 대상이 자신인 줄 알고 온갖 화려하고 권위로운 방법들을 제안하나 그것들은 모르도카이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에스테르 왕비는 연회에서 왕에게 자신과 자신의 민족인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고 그 위협을 가한 자가 하만이라고 폭로한다. 그리하여 하만은 모르도카이를 매달기위해 마련한 말뚝에 자신이 매달리게 된다. 유다민족을 말살하라는 칙령은 취소되고 유다인들은 오히려 자기의 원수들을 칼로 쳐 죽였다. 이 일을 기념하고자 모르도카이는 유다인들에게 해마다 아다르 달 열나흗날과 열닷샛날을 푸림절 축일로 지내도록 하였다.
에스테르기는 유딧기와 비슷한 전개를 보여준다. 여성이 아름다움을 통해 권력자에게 다가가고 커다란 위험 앞의 민족을 구한다. 다만 에스테르는 유딧보다는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왕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라는 모르도카이의 요구에 처음에는 '그러기 힘들다'며 궁정 상황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러다 나중에야 결심을 하고 왕 앞으로 나가보는데 무서워 실신하기에 이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에스테르의 이러한 두려움은 유딧 이야기와는 다른 면에서 민족들을 뜨겁게 결합시키는 역할을 했으리라. 크나큰 두려움을 직면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를 통해 에스테르는 민족을 위해 목숨을 거는 강인한 유다인으로 거듭하게 된다.
여성의 입장에서 에스테르기를 읽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남성들에 의한 대상화를 거절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들의 모습이었다. 에스테르의 주체적 변모도 이야기되지만, 연회에 나가길 거절한 와스티에게 눈길이 더 가는 게 사실이다. 폐위된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렸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