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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 한 4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 한 4주차

고래의노래 2022. 2. 11. 17:27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여섯번째 주인공은 백설공주입니다. 백설공주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2기가 진행중입니다.

[유리관 속의 공주]

백설공주는 난쟁이들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낯선 이를 계속 집에 들인다. 어릴 때 백설공주를 읽으며 가장 답답한 부분이었다. '낯선 이를 따라가선 안되고, 집에도 들이면 안된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도 적용되는 원칙이었기에 더 어이없어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얻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제한된 공간의 '결박된 안전'이라면? 숨죽인 채 살아가는 생존(난쟁이)과 위험한 성장(유혹하는 노파) 사이에서 백설공주의 삶은 내적 갈등의 극단에 치닫는다. 그리고 결국 유리관에 눕혀진다

저자는 유리관이 백설공주에게 생존을 위한 최후의 피신처이자 어머니가 딸에게 바라는 두가지 모순된 요구 사이의 타협점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다른 이들에게 아름답게 드러날 것과 그렇더라도 독립하지 말 것, 즉 어머니를 드높일 수 있을 만큼의 성공과 매력을 보이되 여전히 그 원천은 어머니여야 한다는 것이다. 백설공주는 이 숨막히는 통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왕자는 왜 죽은 여자에게 매혹되는가]

여주인공이 왕자를 통해 구원되는 옛이야기들은 페미니즘의 비판을 받곤 한다. 마치 여성이 가진 삶의 문제들이 남성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옛이야기의 표현 아래 상징적 의미들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저자는 공주와 왕자의 만남이 '서로에게' 운명적 구원이었다는 것을 왕자의 서사를 통해서 한겹한겹 밝혀낸다. 백설공주와 왕자가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으며 이점이 둘을 무조건적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백설공주는 삶에서 실제적으로 또 근본적으로 아버지를 상실했는데 이것이 백설공주 내면의 기본조건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성적으로 불안정한 어머니가 성숙한 여인으로 스스로 설 수 없었던 데는 배우자의 부재가 큰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부재가 아닌 배제'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뒤엉킨 내면의 모순이 악순환에 빠지는데 배우자의 부재는 가속도로 작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는 자신을 참된 삶으로 들어서지 못하게 해 온
어머니의 아이로 남아서는 안 된다.
자심감을 지닌 성숙한 여자로서 삶을 기획하도록 허용하는
아버지에게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백설공주가 내면에 아버지를 되찾는 것을 저자는 '성숙과 독립'이라고 해석한다. 맥락상 이해가 되는 해석이었지만 '어른, 남성'으로 상징되는 아버지를 이제까지는 '여성성에 대한 내적 모순'을 촉발한 가부장제로 연결해왔기에 아버지를 긍정적인 다른 의미로 살펴보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자가 백설공주 해석의 초반에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인물 안에 다양한 면면이 존재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백설공주의 원본으로 저자가 언급하는 [아름다운 블랑카]이야기에는 왕자(백작)의 서사가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파문당하고 죽어서 연옥에 떨어진 아버지가 교회화의 화해를 통해 고통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달라고 어머니에게 간청한다. 어머니는 이를 아들(백작)에게 부탁하고 백작은 교황에게 향하게 된다. 교황은 사면을 위해 조건을 내걸고, 귀향길에 있는 모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리하여 여행길 중간에 들어선 성당에서 백작은 유리관에 누워있는 블랑카를 보게 된다.

"내게 선물로 주십시오. 백설공주를 보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으니까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들고 존중할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백작(왕자)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죄많은 아버지와 성스러운 아버지(교황)을 자신 안에서 화해시키는 과제를 맡는다. 아버지의 부재와 모순점에 대한 내면의 통합과제, 이것이 백설공주와 왕자의 공통적인 것이다. 이러한 내적근친성으로부터 왕자는 '못보면 죽을 듯한' 끌림을 느낀다. 분석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백설공주 안에 있는 아니무스와 왕자 안에 있는 아니마를 서로에게서 발견하고 이끌리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이 부분은 조금 헷갈렸다. 남성성의 이면으로 내면으로 억압한 것들을 아니마라고 한다면 왕자가 억압했거나 통합해야하는 부분은 백설공주의 어떤 면이라는 걸까? 왕자가 백설공주를 돈으로 사려하다가 거절당하고 존중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남성적 규칙'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여성적 원칙'인 사랑으로 이뤄내는 것이 과제라고한다면 왕자가 백설공주에게 투사한 아니마는 보편적인 여성성인 걸까? (가시장미 공주 이야기에서 왕자는 공주의 '수동성'에 끌린다.) 그렇다면 내적근친성은 다만 많은 여인 중 백설공주에게 아니마 투사를 하게 된 조건이라는 걸까? 너무 많은 요소들을 복합적으로 사용되어 저자의 해석이 명확하게 이해되지가 않았다.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성직자와 심리치료사는 백설공주를 다만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을 뿐, 내면의 구속상태를 풀어줄 에너지는 줄 수는 없다고 한 부분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한 부분이 딱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이리저리 퍼즐을 맞추고 유의미하고 놀라운 깨달음들을 얻어갔다. 그리고 이미 나에게 주어져 있는 기쁨에 연결되는 것이 근본 핵심이라는 것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런데 거기까지 향하는게 힘들다. 저자는 이런 상태에 대해 적절한 비유를 든다. '광석에서 은을 분리하려면 먼저 모두 융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내면구조를 풀어내기 위해선 바깥으로부터의 온기와 사랑이 필요하다.

"동화는 사랑의 불안 탓에 거부당하는 삶을 곧 죽음으로 여기고
그 해법으로 오로지 지상의 사랑을 통한 구원만이 가능하다고 본다.
죽음 저편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행복을 통화는 약속한다."


왕자의 행위는 본래적 의미에서 구원이 아니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의도적인 치료행위가 아니라 다만 무조건적 끌림이며 새로운 융합이기 때문이다. 왕자가 할 일은 백설공주가 스스로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역할을 하되, 역할에 빠져들지 않고 다만 '사랑하는 사람'일 것. 그래서 왕자는 유리관을 억지로 열지 않고 사랑과 존중을 약속하며 함께한다. 이제 디즈니가 왜곡했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나아간다. 왕자의 키스가 아니라 왕자의 사랑으로 백설공주의 관이 열리게 되는 과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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