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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한 1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한 1주차

고래의노래 2022. 1. 25. 22:42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다섯번째 주인공은 백설공주입니다. 백설공주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2기가 진행중입니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읽고 마음에 남았던 부분

- 왕비가 원한 아이는 눈처럼 희고 피처럼 붉고 '창틀처럼 까만' 아이였다.
- 왕자는 난쟁이들이 황금을 다 준다해도 공주의 관을 줄 수 없다고 하자 그럼 '선물'로 달라고 한다.

[금지된 소망, 얼어붙은 삶]

그림형제의 백설공주 이야기에서는 백설공주의 친모에 대한 설명이 매우 축약되어 있다. 눈이 오는 겨울날 창가에서 바느질하던 왕비는 바늘에 손가락이 찔려 피를 흘리게 되고, 눈에 떨어진 빨간 피를 보며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빨갛고 창틀처럼 까만 아이'를 소망한다. 저자는 이 짧은 설명만으로 백설공주 어머니에 대한 분석을 해나간다. 왕비가 소망한 것은 눈처럼 차갑고 붉은 피처럼 열정적인, 금욕과 순수의 대립이 공존하는 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왕비가 그러한 대립 속에서 분열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가 성적인 감정에 대해 죄책감을 일으키는 가톨릭의 도덕 아래에서 여성으로서 성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에 대해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는 것 또한 가시장미 공주에서처럼 여성으로서 성적으로 깨어나는 일을 고통스러운 폭력으로 경험한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왕비처럼 여성 역할에 대해 매우 불안정한 여성들은 여성으로서의 자각이 일어나는 경험들을 소녀시절에 어떻게 통과했을까. 저자의 추측들은 나의 경험과 너무나 비슷했다. 월경을 긴장과 불안 속에서 부끄럽게 여기고 스스로의 몸을 성적인 유혹체로 죄악시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몸이 주는 경험들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의 몸을 긍정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었다. 나 자신을 긍정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과 그렇지 못한 사고패턴 사이에서 분열했고 그런 분열의 틈을 메우고 온전한 나로 거듭나고 싶어서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으며 몸의 역사를 돌아보는 모임도 매년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검은 창틀 속의 왕비라는 이미지에서 연상되는 것처럼 왕비의 자아는 이미 파괴되어 죽어버렸다. 백설공주의 어머니는 그래서 딸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길 소망하며, 결국에는 사악한 계모가 되어 거울 앞에서 아름다움에 집착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을 고양시킬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 때문에.

[거울 앞에 선 나르시시즘]

라푼첼에서처럼 저자는 창가 앞의 왕비와 거울 앞의 왕비가 동일 인물이라고 해석한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동일한 인물의 본질적인 변화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여성성에 대한 죄책감과 불안을 혼란스럽게 느끼지만 자신의 본질을 포기할 수 없기에 왕비는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춰보기 시작한다. 유혹과 금지 사이에서 아름다움은 직접적인 여성적 카리스마로 드러나고 왕비는 나르시시즘의 느낌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왕비의 상태를 '나르시시즘에 빠진 과잉 반성'으로 정의내리는데, 용어가 인물을 제한적으로 판단하게 하는 걸 경계하며 이런 질문 또한 덧붙인다.

"한 소녀가 주변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자기 존중의 찌꺼기나마 보존하기 위해 절망적으로 애쓸 때,
이것을 두고 과연 '나르시시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는 '히스테리'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이런 노력을 들이는데, 진정한 이해를 향한 이런 세심함에 나는 여러 번 위안받는 느낌이었다. 자연스러운 자기인식이 무너진 상태에서 왕비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계속 허우적거리게 된다. 타인이 바라보는 나와 내 존재 자체 사이에서 조화로운 상태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유혹체라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유일한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모두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통해서.
왕비의 내면에 대한 이러한 추측은 백설공주의 저본이라 할 수 있는 무조이스의 '아름다운 블랑카' 이야기로 힘을 얻는다. '아름다운 블랑카'에서는 블랑카의 의붓어머니인 리칠데의 삶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수도승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질만큼 경건한 순결에 집중했던 남편(군더리히) 사이에서 부인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 그 때 알베르투스 신부가 부인의 심적 혼란스러움을 해소시켜주었고 리칠데가 태어나게 된다. 리칠데는 어머니와 수도원에서 생활했으며 면담실 철창 사이에서 기사들을 만나고 주변인들에게 반복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찬양을 들으며 남자들을 자신때문에 경쟁하게 만든다. 그는 세상 최고의 미남과 결혼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게 되고,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마법의 거울에게 그게 누구인지 질문을 하는데 거울이 보여준 대답은 이미 결혼한 곰발트 백작이었다. 백작은 최고 미녀가 자신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촌이었던 아내와의 결혼이 근친상간으로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이혼을 한다. 그 당시 곰발트 백작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고 죽어가며 블랑카를 낳는다. 리칠데는 결혼과 동시에 블랑카의 의붓어머니가 된 것이다.

성스러움과 사랑 사이의 갈등이 성적 존재로서의 몸에 대한 혼란을 통과하며 어떻게 외적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지, 리칠데의 서사는 꽤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성스러운 수도원과 화려한 성이라는 극단의 장소들을 거치며 의붓어머니의 내면엔 스스로 봉합하기 힘든 균열이 생겨 버렸다.
나는 아직 '여성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의 몸으로 내가 겪어낸 것들을 여전히 소화하는 중이다. 여성들과 모임 안에서 여성으로서의 삶 이야기를 나누며, 경험을 새롭게 해석하고 슬퍼했어야 할 일을 애도하고 있다. 자아 분열의 틈을 메우고 자신감과 자부심으로 향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런데 그러한 여정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며 오직 누군가의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은총'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손없는 소녀'의 이야기보다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그 사랑은 설마 이성과의 로맨스만을 의미하는 걸까? 가족이나 친구, 동료와의 사랑으로는 불가능한 건가? 이어지는 해석들을 따라가다보면 희망을 찾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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