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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x 여성] 손없는 소녀와 함께 한 3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 x 여성] 손없는 소녀와 함께 한 3주차

고래의노래 2022. 1. 5. 22:53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다섯번째 주인공은 손없는 소녀입니다. 손없는 소녀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2기가 진행중이며, 2022년 5월경 3기를 모집합니다.

 

[소녀는 왕과 왜 헤어지는가]

 정원으로 들어온 소녀를 왕은 왕비로 맞이하고 은손을 만들어 끼워주며 지극히 살펴준다. 왕비가 된 소녀는 왕이 전쟁에 나가 있는 사이 아기를 낳는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는 전령을 시켜 이 소식을 왕에게 전한다. 그런데 중간에 악마가 끼어든다. 전령은 길을 가던 도중 잠들고 악마는 편지를 바꿔치기 한다. 왕과 왕의 어머니 사이 소통은 몇번이나 반복된 악마의 개입으로 완전히 뒤틀려 궁전으로 온 마지막 전갈은 왕비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왕의 어머니는 죄없는 왕비를 죽일 수 없어 대신 사슴을 죽이고 왕비와 아기를 도망치게 한다.

 소녀는 왜 왕과 함께 머물며 행복할 수 없었는가? 왕은 아버지와 완전히 반대되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소녀의 욕구를 부정하게 하고 죄책감을 심어주었다면 왕은 소녀가 원하는 것을 맘껏 펼칠 수 있는 배경이 되어준다. 이런 왕의 능력은 소녀의 심리적 억제에 균열을 내주지만 소녀 안에 또다른 양상의 의존성을 강화시킨다.

"지금까지 아버지 형상이 금지하고 제한하는 방식으로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했다면,
왕의 형상은 소녀의 삶을 관대한 방식으로 절대적으로 지배한다."


 왕이 할 수 있는 것은 은손을 만들어주는 것, 딱 거기까지이다. 은손에는 소녀의 삶과 의지가 깃들어 있지 않으며 이는 계속적으로 소녀에게 과제가 되어 돌아온다. 원하는 것은 뭐든 소망해도 되는 환경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소녀의 내면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저자는 가능해진 소망을 소녀가 쉬이 움켜쥐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은손을 받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소녀의 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서 저자는 이야기에서 표현되지 않은 인물들 사이의 서사를 추측해나간다. 왕은 자신의 선의 앞에서 주저하는 소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소녀는 소망 앞의 신중함이 보상받지 못하는데 좌절할 것이라고. 이렇게 둘 사이의 소통은 내적 아버지라는 악마의 개입으로 단절된다.

"이 세상에서 당신의 기대를 충족시킬 것은 없는 것인지..."


 저자가 왕과 왕비 사이 가상의 에피소드를 상상하며 적어놓은 왕의 저 대사를 읽고 얼마나 놀랐던지! 난 무언가를 구매할 때 언제나 주저하며 결국 이리저리 다 돌아다니고 며칠을 고민하다가 구매를 포기하기도 한다. 그래서 쇼핑은 나에게 즐거움이기 보다는 고난인데, 남편이 이를 답답해하며 딱 저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저 까탈스럽게 내 기준이 높다고만 생각했는데 마음 깊은 곳에는 소망에 대한 뿌리깊은 죄책감이 작용하고 있었던걸까?

 왕은 소녀와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를 내쫓는다. 이야기 속에서는 이것을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유년기의 감정에 사로잡혀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번째 떠남은 첫번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소녀는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느낀다. 왕의 어머니가 순결한 피를 흘리게 할 수 없다며 사슴을 대신 죽이는 것이 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왕과의 만남으로 인해 소녀는 심리적 허들을 하나 넘은 셈이다. 저자는 '소녀의 무죄를 늘 알고 있고 옳지 않은 살해에 저항하는 차원이 소녀 안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데, 내면의 이 부분이 소녀를 인도하고 결국 소녀는 닿아야 할 곳으로 가게된다.
 '누구나 자유로이 살 수 있는 곳'에 머물며 소녀는 통찰에 이른다.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악마적 인간이든 모든 가능성을 약속해주는 신적 인간이든, 타인에게 자기 삶을 의존해서는 안되며 오로지 우리를 절대 지지하는 다른 존재(하느님)의 은총에 기대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동화는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은혜로움을 신뢰함으로써
자기 손을 다시 사용하고 불안으로 가득 한 심리적 압박감을 극복하는지를 이야기한다."


 보답받을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 은총을 받는 존재라는 깨달음은 종교의 핵심목표이다. 나는 이것을 온 몸으로 겪고 싶어서 세례를 받았고 여전히 종교 근처를 배회하고 있다. 그것이 진리임을 믿지만, 그 믿음대로 살아가진 못한다. 여전히 난 의무 속에서 허덕이고 나 자신을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신학자인 저자는 이러한 존재적 확신을 '하느님'이라고 명명했지만 굳이 신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소녀가 궁에서 떠날 때 내면에서 울리던 작은 외침, '너는 죄가 없다!' 이 목소리가 하느님이요, 내면의 인도자이고, 고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가야할 방향으로 이끄는 힘 아닐까. 결국 소녀를 자기자신이 되는 길로 이끌기 위해 내면의 힘은 소녀를 왕과 헤어지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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