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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 한 5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 x 여성] 백설공주와 함께 한 5주차

고래의노래 2022. 2. 18. 11:19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여섯번째 주인공은 백설공주입니다. 백설공주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2기가 진행중입니다.

[안에서만 열리는 관]

세상의 황금을 다 준다해도 백설공주의 관을 내줄 수 없다던 난쟁이들은 백설공주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받들고 존중하겠다는 왕자의 약속을 듣고 관을 내어준다. 왕자는 하인들을 시켜 관을 어깨에 메고 가게 하는데, 중간에 덩굴에 걸려 관이 흔들리자 백설공주의 목에서 독사과 조각이 나와 백설공주가 깨어난다.

공주가 죽음같은 삶에서 깨어나 왕자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디즈니는 이 중요한 장면을 왕자의 키스라는 로맨틱한 이벤트로 바꿔버린다. 삶의 고난을 견뎌온 백설공주가 어떻게 스스로 바로서게 되는지에 대한 상징을 삭제해버린 셈이다. 옛이야기들을 축약본이 아닌 원본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점은 왕자가 공주의 관을 얻기 위해 사랑과 존중을 약속했다는 것과 백설공주가 깨어나는 것이 의도치 않은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왕자는 공주와의 사이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다. 관을 열어보거나 백설공주를 깨워보려 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랑하겠다는 마음뿐이었다.

"백설공주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죽은 듯 누운 여자의 삶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이
여자로서 성욕을 주제화하고 분석하고 대상화함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통제와 외부관찰로 이루어진 유리뚜껑을 제거하는 가능성을 가장 먼저 여는 것은 '받아들여진다'는 감정이다."


저자는 비난하지도 훈계하지도 않고 성급해하지도 않으면서 지지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그러한 분위기에서만 백설공주가 사과를 토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필요한 것은 분석도 아니고 목표를 향한 노력도 아니다. 그저 곁에 있으며 공주가 죽음에서 깨어나 여기가 어딘지 물을 때, "당신은 제 곁에 있습니다."라며 존재를 받아줄 사랑이다. 그러한 상황에서만 공주는 목에 걸린 솔직한 감정과 생각들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여지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애써왔던가. 여성들에게 던져진 모순된 메세지 아래에서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기준들을 따르느라 내 자아는 분열되어 찢어졌다. 쓰린 상처들을 움켜잡고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삶을 돌아보고 분석하고 조각들을 맞추는데 온 에너지를 쏟았다. 그리고 빨리 '내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 되고 싶었다. 그 모습과 지금과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좌절했다. 마치 정신은 깨어있는데 몸은 잠든 가위눌림 상태가 계속되는 느낌이었다. 유리관 안에서 나는 눈을 뜬 채 죽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힘든지 알아내기 위해 삶을 돌아보고 나를 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달랐다. 그것은 아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얼마전 나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는 사건을 겪었다. 이제까지 내가 나라고 바라보고 있던 건 '내가 되고 싶은 모습', '내가 될 수 있었던 모습'이라는 걸 알게됐다.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마주하자 경계심에 잔뜩 날이 선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가 보였다. 그렇게도 싫어했던 엄마의 모습이었다. 나를 아프게 한 그 힘이 나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면이 조금 있지만 그건 나의 아픈 면인거야.'라며 거부했던 부분을, '어쨋든 그건 지금의 나'라고 받아들이자 삶이 삐걱거리며 방향을 트는 것이 느껴졌다.

[처벌하기와 용서하기]

"용서는..백설공주의 관이 열리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결코 밖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어머니라는 존재와 같은 부분을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삼켜버리는 저 케케묵은 동일시는 겁내지 않을 만큼 충분히 거리를 둘 수 있게 된 결과로서."


엄마는 나에게 건강하지 못한 내면의 패턴을 전해주었다. 여전히 떠올리기 힘든 기억들도 있다. 아프고 슬프고 화도 난다. 하지만 그 감정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하지 못한채 떠올라 부유한다. 내 삶이 이해될수록 각자의 삶이 가진 서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주어진 과제를 껴안고 뒹구는 애처로운 인물들이 보였다. 삐뚫어진 최선 안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이...

백설공주 이야기는 왕비가 빨간 무쇠신을 신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추는 장면으로 마무리가 된다. 마치 왕비가 백설공주에게 분노로 달궈진 신을 신기고 사람들 앞에서 춤을 추듯 삶을 드러내보이게 했던 것처럼, 고스란히 같은 방식으로 죄가 되돌아온 것이다. 이제까지 부정되고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는 상징으로서의 처벌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처벌은 다른 모습이리라. 왕비는 이미 '거짓된 삶'을 살아오면서 벌을 받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설공주를 읽으며 엄마에 대한 감정이 다시 널을 뛰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지진 않았다. 나에게 새겨진 엄마의 모습에 마음을 내어주자 무쇠신처럼 무거웠을 엄마의 삶에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용서는 처벌을 면하게 해준다는 의미로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행하는 사면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내 삶의 서글픈 부분에 대해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건 어색하게 느껴진다. 다만 흘려보내고 싶은 것이 무엇이고 그 틈에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조금 선명해졌다. 가부장제의 탈을 쓴 채 내 안에 숨어든 엄마의 날선 어깨를 토닥여 쓸어내려 주고 싶다. 그리고 가부장제라는 멧돌에 고통스레 갈렸던 엄마의 삶을 위해 울고 싶다. 천천히..무엇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애씀의 시간에 대한 존중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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