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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x여성] 영리한 엘제와 함께 한 1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x여성] 영리한 엘제와 함께 한 1주차

고래의노래 2021. 10. 26. 15:46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네번째 주인공은 영리한 엘제입니다. 영리한 엘제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현재 1기가 진행중이며, 2021년 12월경 2기를 모집합니다. 

[아버지의 소유물] [영리해선 안 되는 '영리한 엘제']

 

 처음에는 '영리한 엘제' 이야기를 어리숙한 이들이 자신을 제대로 알지못하고 잘난 체하는 모습에 대한 풍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마음이 안좋았다. 

 

  • 이래서 저래서 영리하다는 게 아니라, 다짜고자 영리한 엘제라고 하는 점. 
  • 남편이 엘제와 그 가족의 어리숙함을 영리함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아니면 눈감았다는 점)
  • 결혼 이후에는 남편이 엘제의 게으름(어리석음이라고도 볼 수 있을까?)을 받아들이지 않고 엘제를 버렸다는 점. 

 

 이야기의 이런 부분들에서 계속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맘놓고 깔깔 거릴 수 없었던 이 감정이 무엇인지 저자의 해석을읽음며 이해되기 시작했다. 저자는 영리한 엘제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가 아버지의 재능과 삶의 가치를 자신의 존재로 증명하는 일이라고 해석한다. "딸을 가진 남자가 있었습니다."로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엘제가 '아버지의 딸'임을 명백히 드러내는 상징적 문장이며둘의 관계가 존재론적으로 얽혀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딸'이라는 말을 여기에서 만날 줄이야! 여러 페미니즘 책과 분석심리학 책에서 접했던 이 단어는 자신의 여성정체성을 거부하고 가부장적 문화가 인정하는 힘과 권위를 쫓는 여성을 가리킨다. 표면적인 정의만 들으면 냉철하고 이지적인 대기업 여성 간부들이 떠오르지만,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내면이 분열하여 자기 안의 여성성과 편안히 연결되지못한 채 진정한 나로 살지 못하는 이 시대의 모든 여성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나를 포함해서. 

 

 '아버지의 딸'이라는 단어는 보통 딸의 입장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존재에대해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로 가부장문화에 맞는 기준을 여성이 내면화하고 이를 쫓게 될 때 그는 아버지의 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영리한 엘제가'아버지의 딸'이 되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찾는다. 지적 능력 면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자라온 아버지는 지적 능력을 사랑과 존경의 조건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딸에게 영리할 것을 요구하는데 모순적이게도 딸이 진정으로 능력을 드러내는 건 원하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사실은 오로지 부모의 물음, 

그들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태어나는가!"

 

저자는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딸의 삶에 자신이 받았던 환멸과 실망을 만들어내며, 자식의 실패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자식은, 열등감과 지나친 요구 사이에서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자기 능력 밖이라고 좌절하고 있을때 솟아오른 '비상구'라는 것이다. 지적능력을 존재의 기본조건으로 내면화한 아버지는 딸에게 그 기준을 강요하며 똑똑할 것을 바라지만, 오히려 딸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려 한다. 딸의 성공은 그의 어린시절 열등감을 재생할 뿐이다. 그렇게 딸은 '아버지의 딸'이 되며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둘의 존재는 복잡하게 휘감긴다. 

 

"내가 결코 실패자가 아님을, 너보다 훨씬 잘 할 수 있음을 보여주겠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너는 결코 할 수 없을거야. 

나는 스스로를 쓸모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최소한 네 앞에선!"

 

 책의 이 구절을 읽고 너무나 섬뜩했다. 자식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의 성장과 독립을 바라지 않는 부모를 이제까지는단지 자식을 통해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자식이 성공하면 그걸 내 성공삼는 부모들처럼 말이다. 그런데 자식의 존재로 내 가치를 증명하는 방식이 저런 식으로도 가능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이었던 건 내 모습이 저 문장 안에서 보였다는 거다. 유치하게 아이 앞에서 내 능력을 자랑하던 순간들, 아이의 어설픈 행동과 말을 경멸하듯 바라보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저자는 영리한 엘제의 운명이 우리사회와 교육체계의 일반적 상황이라고 이야기한다. 오로지 지적능력, 그것도 특정 시험에 통과하는 능력만을 높이 평가하고 이 기준을 향해 몰아치듯 아이들을 구겨넣는 시대...'아버지의 시대'에 살고있는 것이다. 나는 힘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아버지의 딸'이었지만, 그러한 가혹함이 싫어서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여전히 '지성'이라는 초자아 아버지가 내 안에 살아있다. 내 경우는 엘제의 아버지보다 더 복잡하게 꼬여버린 것 같다. 의식적으로는 어떻게든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내면화된 아버지'라는 뾰족한 덫이 나와 아이를 더 옭죄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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