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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동화의 지혜-6] 개개 모티브에 대한 보완적 관점 본문
[개개 모티브의 대한 보완적 관점]
-교육학적 관점 / 말
"매일 삶에서 일어나며 감출 수 없는, 상태와 관계에 연루되는 것이 불안하여 이를 배제함으로써 순수성을 얻는 것은 교육용 책이 추구할 바가 아니다....우리가 구하는 순수성은 옳지 않은 어떤 것도 감추지 않겠다는 정정당당한 이야기의 진실성에 있다....올바른 사용이란 나쁜 것을 빼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우리 마음의 소리를 추출하는 것이다."
그림형제가 자신들이 모은 민담집 서문에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 놀랍다. 그 시대에도 어른들이 이야기를 의식적으로 선별했다는 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표현 너머의 '진실성'을 알아보는 것은 그 당시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나는 그림형제가 쫓는 순수성에 공감하는, 그 어려운 걸 해내고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전에 후기에도 쓴 적이 있지만 옛이야기 다시 쓰기로 '가치관을 정화'하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시도에 대해 나는 염려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림형제가 직접 언급한 성경에 대해서는 내가 조금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성들의 성경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구약 성경을 읽어가며 나는 온 몸과 마음이 뒤틀리는 듯 괴로웠다. 구약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철저하게 성적 대상화되어 있었고 남성의 소유물로 이용되었다. 성경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집에 들어온 손님을 불량배들에게서 보호하기 위해 아내들을 '좋을대로 하라고' 내어주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밤새 처참히 몸과 마음이 짓밟힌 아내가 문 앞에 죽어있는 장면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성경도 동화처럼 큰 맥락 속에서 인류의 '진화과정'을 이야기한다. 신과 인간이 직접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던 시대를 지나, 무리가 커지고 타락을 거듭하며 '인간 왕'를 세우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들 사이에, 그리고 신과 인간 사이에 구분이 발생한다. 그렇게 '땅의 시대'를 거치는 인간들을 구원하려 '정신의 하강'으로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자발적 희생이라는 사랑의 정화를 보여준다. 동화의 지혜에서도 구약의 내용이 언급되지만 이는 창세기의 신화적 내용이다. 유대민족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또 그림형제는 어떠한 생각일까...궁금하다. 구약이 전해주는 '이야기의 진실성'은 인간이 정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상태가 얼마나 잔인한 현실을 만들어내는가....일까.
"동화가 말하는 계모는 생모를 완전히 가려, 즉 보이지 않는 엄마를 덮어버려 더는 지상세계에 작용해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사람을 가리킨다...아무리 노력해도 엄마를 대신하는 것은 쉽지 않다...이러한 운명의 문제들은 보이지 않는 죽은 자의 현존과 의식적으로 연결해야만 된다."
계모에 대한 해석이 무척 인상적이다. 생모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며 계모는 이를 인정하고, 아이가 생모라는 '정신'과 연결되는 것을 방해해서는 않된다. 표면적인 표현 너머의 상징이 가진 깊이가 놀랍다.
"켄타우로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 이성이 아니라, 자연 충동들에서 올라오는 지혜였다. 말과 서로 연결되었던 단계를 극복하고서야 인간은 기사가 되어 말 다루는 법을 배웠다. 이로써 인간은 자기 자아로서 충동적인 지혜의 힘들을 제어하기 시작했다...정신분석은 기본적으로 인간 안에 잠재되어 살아있는 이 켄타우로스에 대한 학문이다."
켄타우로스가 정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이드(ID)'에 대응된다는 의미인걸까? 단순히 이렇게 연결지을 수 있는 건 아닐 듯 하지만, 본능적 충동이 단순히 위험한 것이 아니라 지혜를 가졌다는 것이 무척 의미있게 다가왔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에서 이드를 자아가 초자아의 힘을 빌어 제압해야 하는, '제어하기 힘든 야생마'로 여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무의식 안에 숨겨진 이 본능적 충동은 근원적 생체 에너지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어떠한 '힘'이지 그것 자체로 '지혜'로 연결해본 적은 없었다. 어쩌면 '머리보다 영리한 충동'의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 곰 가죽을 쓴 사람 / 직업 / 물의 요정 / 겨울의 신비
“곰이라는 상상물은 인간 이성이 논리 규칙과 사실 증거의 철갑을 두를 때 등장한다...땅의 힘들을 제어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자기 영혼의 삶을 일단 어둡게 하고 황폐하게 하는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번 장에서 언급한 동화들 외에도 앞에서 나왔던 ‘별별별털복숭이’, ‘흰눈이와 빨간 장미’에도 곰(또는 털동물가죽)을 뒤집어쓴 인물들이 나온다. 곰이 마법적 힘으로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나라의 단군신화 속 웅녀를 떠올리게 한다. 곰은 겨울잠을 자는 동물이고 봄이면 다시 깨어난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처럼 해석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빛을 가리고 어둡게 하는 시기’를 통과하는 곰의 인내가 내면의 수련과정으로 표상화된 듯 하다.
“물레방아는 우리가 매일 흡수하는 감각 인상들과 운명의 체험들을 가공해서 그것을 인간 본질의 숨은 부분의 자양분으로 변화시킨다....에테르체는 마치 보이지 않는 조형가가 삶에서 받은 인강과 자극들을 기분 삼아 우리의 내적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
서양 이야기에서 많이 나오는 것은 물레방아보다는 그냥 방앗간이거나 풍차 방앗간이고, 물레방아는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흔히 사용되는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물레방아는 ‘은밀한 정을 나누는 장소’로 이야기되곤 하는데, 방아를 찧는 모습이 성교를 연상시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형태가 바뀌고 가공되는 공간’, ‘융합으로 인한 변화와 새로운 탄생의 공간’이기 때문인 것 같다.
“태곳적 인간 본질은 유동적인 생명요소로 땅을 맴돌았다....이 단계에서 영혼은 개인 내면의 삶을 펼칠 수 없었다.”
얼마 전 “왜 사람들은 물을 보면 좋아할까?”라는 남편의 질문에 나는 “그 곳이 인간의 고향이니까.”라고 대답했었다. 저자가 한숨을 내쉬는 ^^;; 다윈의 진화론이나 지구 역사에 대한 지질학적 추론으로 보았을 때도 물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태어나기 전에 양수 안에서 둥둥 떠다니기도 하고 말이다. 물의 인간 단계에서는 형상도 없고, 피의 온기도 없다. 양서류가 뭍으로 나오고, 땅을 딛으며 피는 온기를 얻는다.
“인간은 굳어가는 세계과 새로 태어나고 있는 세계 사이의 매개자로 개입한다.”
감각 기관의 본질을 체험하며 차가운 겨울을 겪고, 스스로를 조각의 합이 아닌, 일체로 자각하면 여름이 시작된다. 대림절 -> 성탄절 -> 사순설 -> 수난절 -> 부활절 로 이어지는 절기가 영혼이 걷는 길의 상징이다. 여기에서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건 이 길을 개인 영혼의 차원을 넘는 인간의 역할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지학이 바라보는 인간의 특별함이 이것일까? ‘두 세계의 매개자’라는 역할은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고, 그의 수난과 부활이 혼자만의 것이 아닌, 각 개인 영혼의 몫이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티아서 2:20]
이렇게 깊은 상징 면에서는 닿을 듯 말듯 이해되는 부분이 생기다가도, 다가가기 어려운 벽이 느껴진다. 책을 읽어갈수록, 이 책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 자체가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는 바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라는 걸 알겠다. 거의 ‘창세기’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 사과 /천상의 쌍둥이 / 까마귀
“정신분석 심리학이 범하는 오류는 젊은이의 지상적 성숙을 성적 성숙이라는 한 면으로만 평가하는 데 있다...청소년은 이 성장 단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감각계를 온전히 인지할 수 있다. 이성에 대한 감각은 이러한 포괄적 영혼 성장에 포함된 한 현상일 뿐이다.”
“감각적 욕망을 지상적 성숙의 시기에 눈뜨는 소망의 힘들의 원초적 형상으로 본다면, 이는 근본적 오류이다. 젊은이의 영혼이 마음에서 깨어나 사랑의 힘에서 올라오는 이상들을 지키지 못할 때, 비로소 성욕이 힘을 얻는다. 정신분석학에서 리비도라고 하는 것은 성장 중인 영혼의 힘들의 참된 근원이 아니다....리비도는 영혼이 더 높은 세계의 값진 유산으로 땅의 삶에 가지고 들어온 힘들을 집어삼켜 없앨 뿐이다.”
사과는 한마디로 변곡점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에덴동산의 사과도 그렇고, 파리스의 사과, 헤라클레스의 사과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하고많은 과일 중 왜 하필 사과여야 하는지는 알쏠달쏭하지만, 빨갛고 단단한 지상의 동그란 열매는 하늘의 태양에 대비되는 에너지의 정수로 여겨졌을 것만 같다.
성적 성숙은 지상적 성숙의 일부이며 리비도가 영혼의 힘들의 근원이 아니라는 이야기에는 수긍이 쉽게 되었는데, 성욕과 리비도가 이상과 정신의 방해꾼인 것으로 언급한 것은 온전히 받이들이기가 어려웠다. 성에 대한 사회적 맥락이 정신과학의 입장 너머에서 이미 너무 많은 메세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여성과 성의 관계는 더 이상 복잡할 수 없을 만큼 꼬여있고, 여성들은 자신을 둘러친 이 그물을 걷어내고 스스로의 성적 진실을 알아내야할 과제를 안고 있으니 말이다. '자기 인식'의 길에 성적부분은 빠질 수 없는 부분이므로 저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극단적 쾌락의 영역으로 빠져버린 성을 이야기하는 거 아닐까 싶다.
“슈타이너는 기원 시작점에 태어난 예수를 둘로 상정해야 한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하나는 지혜의 왕으로 동방 박사들이 경배한 아기 예수, 다른 하나는 가난의 아이로서 위로 하늘이 열리고 순박한 목자들만 구유를 찾은 아기 예수다. 전자는 지상적 성숙의 시기에 도달한 모든 인류 문화가 응축되어 탄생한 성장 초기의 개성이며, 후자는 먼저 마음 깊이에서 사랑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영원한 아이다. 둘을 합해야 비로소 완전한 인간됨이 나온다!”
서양에는 쌍둥이에 관한 옛이야기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인간 내면에 있는 이중적인 힘에 대해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다른 지역보다 쌍둥이 이야기가 많다면 그건 어떤 의미인걸까 궁금해졌다.
"신화에서는 신이 까마귀를 잃는다. 반면 동화에서는 인간의 지혜의 힘들이 까마귀로 변해 날아가 버린다...인간 의식이 정신세계와 멀어지는 것은 신들에게는 상실이다. 동화에서는 영혼의 성장을 강조한다. 조감각적 사고의 힘들이 자기 자신에 눈떠가는 인간을 떠나간다는 관점이다."
"정신구도자는 정신 본성과의 연결을 복원해서 그 연결이 온전히 생명을 얻도록 깨워야 한다. 다시 말해서 더 놓은 정신 본성을 머리 차원에서 가슴 차원으로 가져와야 한다...이상에 대한 표상과의 결합은 처음에는 사고의 체험에 불과하지만, 영혼에서 기억의 작용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구원이 일어나려면, 이 생각상의 체험이 마음 깊이 들어가 그곳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신화의 관점과 동화의 관점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구분이 흥미로웠다. 이제까지 신화를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의인화이며 이들과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지상에서 천상을 상상하는 관점으로 바라보았는데, 천상에서 지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본다면 조금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저자가 정신을 찾는 이들을 '정신구도자'라고 부르는 것이 갑자기 의미있게 다가왔다. 그건 정신과의 합일이라는 길 위의 인류 전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인류의 과제를 인지한 일부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을 읽는 독자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 사고의 체험을 제대로 해내는 단계도 아니지만, 나 스스로를 '정신구도자'라고 생각하면 막막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문자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삶으로 깨어나는 그 곳으로 한걸음한걸음 가고 있으니 조급해하지 말자.
- 세 가지 영혼의 힘_사고, 감정, 의지 / 엄지소년 / 뱀 / 모자
"판단력은 그것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자기 영혼의 힘들에 대한 깨어있는 지배력을 준다. 판단력은 영혼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친다. 미래는 '자루 속 몽둥이' 즉 어린 개성의 힘에 있다....의식 영혼의 시대, 내적 자유의 힘을 쟁취하는 근대 인간은 조악해 보이지만 완전히 새로운 능력의 출발점에 서 있다."
"아직 어린 의식 영혼의 힘은 정신의 왕국에서 난쟁이다. 하지만 이 힘은 내부에 정복욕을 가지고 있다...이는 지적인 영혼의 삶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려 분투하는 새로운 의지의 힘이다....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실험적이다. 경험이 전해보다 가치가 있다...이들은 사고의 힘을 성장시키는 인간이다."
감정, 사고, 의지에 대한 부분은 이 책을 읽을 때 계속 헷갈리는 부분이다. 영혼의 세가지 힘을 사고, 감정, 의지라고 이야기하는데, 영혼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는 감각 영혼, 이성 영혼, 의식 영혼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는 시대적 구분으로까지 이어서 말하고 있다. 감정과 감각이 같은 의미로 쓰인 말이고, 사고와 이성이 같은 의미이고, 의지과 의식이 같은 의미인 걸까? 원문이 어떤 단어를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각자 미묘하게 다른 의미이고, 게다가 의지와 의식은 명백히 다른 뜻이라서 너무 헷갈린다. 이성, 사고, 지성의 차이는 무얼까? 모두 같은 의미로 말하고 있는걸까.
자루 속 몽둥이라는 새로운 능력과 엄지소년으로 상징되는 의식영혼의 힘은 같은 건가? '의식영혼'의 힘이 세계를 탐색하는 사고의 힘이라면 '이성영혼'이 세계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언어의 덫에 갇혀버린 기분이다. ㅠ.ㅜ
"뱀 형상은 저절로 영원히 갱신되는 인간 본성의 힘들을 가리킨다... 욕망본성이 척수에서 나오는 본능적 의식의 힘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에 유혹하는 힘이 뱀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문제는 이 새로운 능력을 어떻게 대하느냐이다."
뱀은 고대 여신들의 상징인 경우가 많았고, 기독교가 여신문화를 정복하면서 유혹하는 악마의 의미를 덧씌웠다고 들었다. 여기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뱀이 인간 안에 마르지 않는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은 몇번이나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이건 여신상징의 의미와도 연결된다. 그런데 욕망 본성이 본능적 힘과 함께 있기에 유혹의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는 부분에서는 알듯말듯하다. 욕망이 인간을 유혹한다는 개념이 여성이 남성을 유혹한다는 걸로 단순화되었던 왜곡의 역사를 접어놓고 생각하기가 어려워서인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봐야겠다.
"영혼이 정신으로 승격하려면 우리를 자기 세계 안에 잡아두는 모든 땅의 사고 형식들을 영혼에서 털어내야 한다...황금머리칼을 감추기 위해 쓴 모자에서는 더 높은 차원의 겸양이라는 마음가짐이 드러난다....정신은 통해 땅의 물질차원을 완벽하게 통제하게 되기 전에는 이미 손에 넣은 정신의 빛을 땅에 드러내지 않는다."
며칠 전 둘째가 인사하려면 모자를 왜 벗어야하는지 물었다.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못하고 얼버무리고 말았는데, '나를 내려놓고 당신을 만난다'라는 의미였구나. 나를 낮추어 더 높은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기도 하고 준비될 때까지 섣불리 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둘 다 온전한 합일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14세로 대변되는 문턱을 넘으면서 젊은 영혼은 이상으로 가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다시 말해서 우주적 정신의 힘이 젊은 영혼에 전달되는 한편, 영혼으로 하여금 참 본질을 배반하게 만드는 어두운 땅의 힘들과 결합한다. 어떠한 숭고한 노력도 다 왜곡된 상으로 뒤바꾸는 '거울인간'(도플갱어)이 은밀한 적수로서 영혼 속 깊이 침투하기 시작한다."
14세에 정신의 힘과 연결되는 한편, 거울인간도 침투한다. 이제 만 14살을 앞둔 첫째의 변화를 두근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이상으로의 길을 바라보는 희열과 거울인간의 어둠, 그 양 극단을 오가며 겪는 '지구적 고난'을 내가 곁에서 잘 바라볼 수 있기를.
보완적 관점 부분은 이전 부분보다 읽고 이해하고 곱씹는게 어렵다. 아마도 이전에 이미 이야기된 부분들이 있고 그걸 읽은 기억이 또 어렴풋이 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다른 언어로 반복되니 싱크를 맞추는 데에만도 엄청 힘이 드는 것 같다. ^^;;;;
- 늦게 꽃피는 힘 / 죽은 자들의 세계 / 감추어진 초상
“눈떠가는 젊은이의 정열은 저 질풍노도의 거인, 전나무를 꼬는 자로 또 지령들의 경직된 면모에 대항하는 혁명적 욕구는 바위를 깨는 자로 표출된다. 이들은 모두 사회적 삼의 모든 고정된 질서와 전래된 형식들을 뒤흔들고자 하는 충동이다.”
“동화가 늘 특별히 애호하는 대상은 바보, 즉 아이 상태에 머물러있는 본성들이다...이러한 영혼은 조숙한 아이들이 내면에서 너무 빨리 소모해버리는 유년의 힘을 나이들어서까리 간직하고 있다.”
아이들이 다니고 있는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유년시기를 지켜주는 것’을 매우 중요시한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늦춘다. 기계적인 접촉을 최소화하고, 자연과 더 길게 호흡하게 하며 느리고 더뎌 보이는 속도로 천천히 알려주고 서서히 일깨운다.
둘째에게서는 이 순수한 영혼의 풍요가 반짝반짝 빛난다. 오빠에게 “인형들은 살아있다구!”하며 소리치면 14살 문턱의 오빠는 “이제 오빤 그런 거 믿지 않아”라는 팩트폭격을 날린다. 여전히 정신세계와의 연결의 끈을 간직한 둘째와 이제까지의 믿음과 질서를 깨고 다시 새우려는 첫째 그리고 이제 정신과의 합일을 다시 꿈꾸는 나까지, 우리 모두가 동화가 말하는 여정 속 이정표들을 착실히 걷고 있구나 싶다.
“죽은 뒤 영혼이 진입하는 의식상태는 정신적 우주가 그 힘들을 영혼에 은총으로 내리기 시작할 때와 근본적으로 같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투병중이시던 분이 돌아가셔다는 비보를 접했다. 죽음 뒤의 상태가 은총의 세례와도 같다는 이 문장이 위로가 된다.
“온전한 벗어남이 시작돼야 비로소 내면 공간이 생기고, 그 안으로 초감각적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며 쏟아져 들어온다...사후 여정에서 우리가 겪은 땅의 경험들의 총합이 우리에게 다시 다가와 더 높은 세계의 빛 속에서 후숙을 거친다.”
칼 융은 인간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했다. 그래서 죽은 이후 남는 건 그 경험뿐일꺼라고도 말했다. 땅의 경험들은 우리의 사후 여정의 기반이 된다. 그러면서도 그 경험으로 얻는 것들을 기꺼이 벗을 수 있어야 정신 세계와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승세계는 덧없는 것이면서도 잘 살아내야 하는 것인가보다.
“더 높은 인식의 매개자가 지혜의 구도자에게 지식을 전할 때, 지혜의 구도자는 처음에는 실망한다. 이 여정에서 처음 마주하는 것은 지혜의 저급한 모습, 영혼을 흉측하고 희미하게 하는 이성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지혜가 자신에게 오기까지 겪는 왜곡과 마법에서 지혜의 순수한 형태를 구출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동임을 겪어서 알 수 밖에 없다.”
저자가 딱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깨달음의 보석을 저자는 계속 내 앞에 보여주지만, 나에게 일그러져보일 뿐이다. 그래도 그것이 보석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저주가 풀리고 왜곡이 걷힐 때까지 애쓰며 살아가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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