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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지혜-3] 형제자매 이야기 / 인간이 된다는 것 / 12개의 세계 형성력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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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의 지혜-3] 형제자매 이야기 / 인간이 된다는 것 / 12개의 세계 형성력

고래의노래 2021. 6. 16. 16:40

[형제, 자매 이야기]
- 오누이 / 외눈박이, 두눈박이, 세눈박이 / 푼데포겔 / 장미공주

“남성성은 인간 본질의 능동적 측면을 지시한다....이에 비해 여성성은 인간 본질의 수동적, 수용적 측면을 지시한다..”

분석심리학에서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한 것에 대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했다. 말과 글이 지닌 한계가 안타깝다. 생각을 다른 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언어를 쓸 수 밖에 없지만 일단 언어화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은 언어의 경계 안에 갇혀버린다. 게다가 단어 하나하나가 개개인의 삶에서 경험되는 맥락도 달랐기에 ‘오해’는 사람들 수 만큼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한계 안에서 몸부림쳐야하는 게 지금의 과제일 것 같다. 앞으로 미래의 인류는 좀 달라지지 않을까.

“퇴락한 옛 정신의 힘을 포기해야만 영혼은 명징하게 개인 의식을 쟁취하고, 잃어버린 원시의 성스러운 생명력과 다시 결합할 수 있다.”

흰눈이와 빨간 장미가 도시로 향하며 ‘정신을 부정하는 땅의 길’을 택한 것처럼...그 정신은 포기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온전히 합체되어 있을 때는 자각하지 못한다. 분리되고 나서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

“실현되지 않은 의지는 목마름으로 그려진다.”
“아직도 풀지 못한 감각의 갈증의 남은 의지(노루)는 세속의 자의식을 정화의 불로 해소하고 나서야 소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감각에 메인 저급한 지식’인 계모를 내 안에서 태워버려야 갈증에 허덕이는 의지가 잠재워지는 거구나. 여기서 말하는 ‘받아들이는 감각’이라기보다는 ‘물질에 붙잡힌 감각’이겠지? 하나의 단어가 여러 스펙트럼 안에서 쓰여지니 어렵다. ㅠ.ㅜ

내가 무언가를 이해하는 방식이 매우 ‘공식’적이며 ‘표면’적이라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다. 아니면 어떤 단어에 대한 내면의 상이 이미 너무 공고하거나. 이 책에서는 같은 말이 여러 개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처럼 생각된다. ‘피’가 ‘우리 존재의 신적 부분을 죽이는 이기심의 터전’이며 ‘정열 본성의 불길’이라니...이전에 노간주나무에서는 ‘눈 속에서 빛나는 핏방울 형상’은 영혼의 신비로운 성장이 시작되었다는 징표라고 했는데...ㅠ.ㅜ 전자의 피가 ‘열정적 의지’의 상징이라면, 후자의 피는 ‘영혼의 정수’를 상징하는 걸까....? ‘순수한 아이의 본성을 되찾으려면’ ‘피의 정화’가 필요하다할 떄의 피는 영혼 자체에 대한 상징인 것도 같고...

‘땅의 감각적 세상’ 또한 마찬가지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자연을 감각적으로 느끼는 것이 몸에 메여있는 현대인들이 정신으로 나아갈 떄 필요한 부분이라고 이해하고 있었는데, ‘땅’은 자꾸 극복해야할 ‘개념의 세계’로 이야기된다. 눈에 보이는 것을 쫓는 물질주의를 땅의 감각이라고 할 때, 자연과의 연결에 있어서 첫 관문인 감각적 열림은 완전 다른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건지...같은 단어, 다른 뜻....내가 힘든 건 언제나 이런 거다. 

이렇게 작은 구분들에 걸려 넘어져서 헥헥 거리는 게 이 책에서 말하는 ‘경계지어진 대상과 경직된 내면의 세계’에 내가 살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잠자는 동안 인간의 영혼을 자기 내면의 모상들을 산출해내 자연계에 더해줌으로서 자연을 풍요롭게 한다.”라는 장미나무 이야기 부분에서는, 그야말로 탁 걸려 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제까지 인지학에 깊숙히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멈추었던 바로 그 허들을 마주한 기분이다. 
일단 읽어나가자. 지금 나에게 편하게 들어오는 것이라면 날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다. 불편하고 어려운 것에 맞닦드리고 그걸 그냥 통과해볼 때 나에게 어떤 것이 다가올지...궁금하다. 

오늘 다른 책에서 영혼, 정신에 대해 구분해서 설명하는 부분을 만났다! 다행히 아주 헛발질하고 있던 건 아닌듯! (인생의 씨실과 날실 17페이지)

정신은 우리 안의 영원불멸한 부분이다. 진리나 선 같은 이상의 빛이 사고 속에 비쳐들 때, 신에 대해 명상할 때,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일 때, 타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 높은 본성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정신적 자아와 연결된다. 기도와 명상, 헌신은 정신을 위한 행위다. 

-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육체와 정신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영혼 영역이다.행위와 감정, 생각, 즉 의지, 느낌, 사고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건 역시 영혼 속에서 벌어진다. 배고픔, 갈증, 성욕 등의 욕구는 아스트랄체 또는 영혼에서 솟아나지만 그 욕구를 충족하는 영역은 물지육체다. 그런 욕망 위에 이상, 정신적 가치, 진리의 빛이 비쳐 들어오면서 팽팽한 긴장이 형성된다. 

자아 또는 에고라고도 부르는 '나'는 영혼과 육체를 넘어서는 존재다. 자아활동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역, 순수한 정신에서 기인하며 우리에게 영원함과 연속성의 느낌을 부여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
-헨젤과 그레텔 / 황금 아이들 / 두 형제

“정신은 땅이 육신에 매이면 그 본질이 파괴될 위험에 처하는데, 영혼이 이를 간파할 때에만 정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이기심으로 굳어버린 저금한 감각을 정화하리라 결심할 때 영혼은 영원한 자아를 육신의 굴레에서 떼어내 이와 연대하여 자기 근원으로 귀환할 수 있다.”

그레텔(영혼)은 헨젤(정신)과 함께 땅의 육신(고자집)에 메이는데, 마녀(저급한 감각)를 아궁이에 넣어 죽인 후에(정화) 원래의 집(자기 근원)으로 돌아온다. 

정말 많은 생각이 드는 부분이었다. 너무 놀랍고 내 안에 쌓여있던 생각, 감정, 인상들과 저자의 글이 연결되면서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에 묘한 두려움까지 일었다...
헨젤과 그레텔은 페미니즘적 관점에서는 수동적이었던 여성 캐릭터가 능동적으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로 많이 언급된다. 그런 관점도 현재의 여성들에게 주는 에너지가 있을 꺼라고 믿기에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깊게 들어가서 인간의 성장여정으로 바라보니 완전 다른 차원으로 이야기가 다가온다. 책의 이전 부분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화 속 인물들이 갖는 상징으로 연결했는데, 흔히 남자아이로 나오는 정신이 여자아이로 나오는 영혼의 알아챔으로 해방된다고  생각하니....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무언지...희미하게 알 것만 같다. 여성성이 단순히 인간 여성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단순화하기엔 조심스럽지만, 여성성을 근본으로 한 인류가 여성이라고 한다면, 직관적인 인식을 통해 인류를 이끄는 힘이라는 게 여성들의 내면의 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정신의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발아래 땅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삶의 강을 건너는 다리는 없다. 정신의 날개를 타고 건너편으로 갈 수 밖에 없다.” 

땅의 사고체계를 버리고 나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낀 적이 있었다. 심리상담을 받으며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로 작업을 했었는데...연상 이미지 속에서 나는 힘든 달리기를 하고 있었따. 멈추고 싶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잔디밭에서 서로 손을 잡고 기쁘게 놀고 있는 무리에 다가가기 위해 겨우 달리기를 멈추고 다가갔으나...그 뒤가 낭떠러지인 것을 발견하고 놀라면서 이미지 연상이 끝났다. 그 때 난 내가 붙잡고 있는 사고시스템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견고하게 날 붙잡고 있으며 그걸 놓는 순간 절벽으로 떨어지는 죽음이라는 공포를 가지고 있구나 깨달았었다. 맞다. 다리는 없다.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죽지 않을 꺼라는 믿음으로’ 날아오르는 수밖에. 

“상상의 경험은 깨어 있음에서 잠으로 넘어가는 중간 지대의 영혼의 힘과 활동을 밖에서 본 형상이다....광대한 정신세계의 인상들을 붙드는 법을 배워햐 한다. 이 인상들을 나의 의식으로 가져오기는 쉽지 않다.”

꿈을 기록해가며 이점을 살짝 경험하고 있다. 꿈을 기억하고 그것을 글로 적으려는 순간, 한 글자 적어내기 힘들 때가 많았다. 꿈을 낮의 현실이 가진 논리의 세계로 정리할 수 없었던거다. 분명히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인식의 단어들로 옮겨지지 않는 답답함을 느꼈었는데, 아마 저자가 말한 ‘정신세계의 인상들’은 그보다 더 한 막막함이 아닐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아가 되기 위해서는 커다란 희생이 있어야 한다. 개인 인격이 된 인간 존재는 자기 이성에 갇혀 본래 사명을 잊는다. 불멸의 존재로 남아있는 형제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불멸의 형제에게 땅에 내려올 용기를 주는 것은 사랑이다.”

소녀시절, 내가 모르는 내 쌍둥이가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곤했다. 두 명의 사람이지만 마치 한사람처럼 마음이 연결되어 같이 아프고 같이 슬퍼하며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쌍둥이는 나에게 경험하고 싶은 신비함이었다. 
심리학의 등장으로 인류는 인간의 내면에 의식뿐 아니라 무의식도 존재함을 ‘공식적으로’ 알게 되었다. 존재 깊숙이에서 느껴지는 외로움은 바로 내가 미처 잡지 못한 나의 반쪽에 대한 그리움일지도 모르겠다. 현재 인류는 태생적으로 ‘천상의 형제’를 기다리는 ‘돌이 되어 버린 황금아이’이다. 

“의식은 못하지만 영혼이 세계의 가장 순결한 이 힘과 하나가 되는 것은 밤에만 가능하다.”

꿈모임을 하면서 이 말은 점점 현실로 경험하고 있다. 확실히 꿈이야기를 듣고 이에 대해 이야기나누다보면 낮의 의식에서 바라보던 모습이 우리의 전체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진다. 오히려 내가 지금 경계하는 것은 이러한 믿음때문에 밤의 세계를 낮의 의식으로 샅샅히 파헤치려고 하는 욕심이다. 중요한 것은 의식으로 가져오는 것보다 연결되는 것이라는 거....그걸 잊지 말아야겠다.

“동양은 낙원을 찾아 헤매고, 서양은 지구를 정복하고 물질계를 지배한다. 대별되는 인류의 계통은 서로 의탁관계에 있고 다시 만난다.”

언어의 한계에 매이고 싶지 않지만 여러 번 반복되는 저자의 동양, 서양 구분에는 불편감이 든다. 땅의 세계에 안착하는 모험은 일부 서양이 주도했을지언정 지금은 동서양을 가릴 수가 없고, 미국 유럽의 서양, 아시아권의 동양 이외의 지역에 많은 문화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상을 향해 나섰다가 돌이 되버린’ 황금아이(서양)가 ‘천상의 아이’(동양)와 동화에서처럼 관계없이 지냈던 게 아니라, 역사 속에서는 서양이 다른 지역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시기가 있었기에 ‘사랑’으로 뛰어나가 감싸안는 역할을 덥썩 맡기에는 억울함이 올라온다...내 안의 감정, 저자의 한계 등을 잘 걸러내며 읽어나가야겠다.

 


[12개의 세계 형성력]
- 열두사도 / 열두 오빠 / 열두 명의 사냥꾼 / 닳아빠진 구두

“감각은 형성 중인 인간 자아를 위해 온 세계에서 자양분을 그러모아 유일한 신의 생명을 12개의 문을 통해 영혼의 심층으로 나른다.”

“땅의 육신에 남게 된 감각은 진정한 생명을 일은 관이다. 자아성장의 필요조건은 필연적으로 자아를 빈곤하게 하고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책에서 ‘감각’이라는 단어가 때로는 해방의 도구로 때로는 자유를 막는 족쇄로 사용되어서 혼란스럽다고 적은 적이 있었는데, 이 부분을 읽으니 이해가 된다. 인지학에서 이야기하는 감각이 12감각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하위감각 뿐 아니라 상위감각까지 포함한 단어이기에 문맥에 따라 상반된 의미로 쓰여졌던 것 같다. 

“나의 존재 자체가 죄와 연루되어 있다는 통찰은 언제나 충격이다. 동화가 건드리는 지점은 바로 심오한 신비의 진리, 즉 종교에서 원죄의 이미지로 묘사하는 오래된 생각이다.”

정신과의 결별로 인류에게 의식이 주어졌으며 그것이 존재의 원죄이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 또한 그러한 상징일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분리’가 일어났으며 그것은 죄악이 된다. 그리고 그 벌로 여성은 출산의 고통을 받는다고 되어 있다. 진화적으로도 이 의미가 연결되는데, 인류가 ‘두뇌’를 선택하고 두발걷기를 시작하면서 출산은 인간에게 특히 가혹한 모험이 되어버린다. 산도가 좁아지고 아기의 머리는 커버렸기 때문이다. 내가 경이로움을 느낄 때는 이런 순간이다. 전혀 다른 분야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느낄 때...

어릴 때부터 밤하늘과 우주는 나의 성전이었고,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천문학적으로 여러 공식과 숫자 안에서도 우주를 만나고 공부했지만, 내 안의 이 경이로움을 퇴색시킨 적은 없다. 오히려 더 강화시켜 갔다. 인류사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상을 해체시키고 구분하는 이성의 논리가 정신과의 연결을 약하게 하고 영혼을 땅으로 더 끌어당긴 부분도 있지만, 나의 경우처럼 오히려 그 정신으로 더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건 ‘인식의 불’이 켜진 이전이냐 이후냐의 차이일 수도....

“언어의 힘을 의식적으로 누르는 침묵은 내적 체험의 여지를 늘린다. 이보다 더 높은 침묵은 삶의 전횡에 대해 내적으로 침묵하는 것이다.”

내 안의 목소리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진짜’ 바라냐고 묻는다면, 조금 주춤거리겠지만(아직 정신의 날개로 절벽에서 날아오를 준비가 안되었으니...)그것이 ‘온전한 나’로의 길이라는 확신은 있다. 그 순종의 길에는 지금의 나에게는 고통과 죽음인 과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침묵’이라고 하자, 단어에 반응하듯 질문이 떠올랐다. 침묵은 양껏 소리쳤던 이들에게 주어지는 과제이다. 아직 소리쳐보지 못했던 이들이 침묵한다면 어쩌면 목소리를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인류 형성의 대법칙이 개인의 삶에 반영’되고, 이것이 민족이나 지역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 지금의 나와 내가 속한 우리의’ 영혼의 운명’은 어느 지점에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서구 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 특히나 더. 게다가 역사 속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본 적 없는 여성들에게 '침묵'은 되돌려야할 상태가 아니라 극복해야할 억압이기도 하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로서 '삶의 전횡에 침묵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정말 어려운 과제인 것 같다. 얼마 전에도 '운명에 순종하는 선택을 하는 자유'에 대해 주변 엄마들에게 얘기했는데 호된 반발이 일어나기도..^^; 잘 소화하고 전하고 싶다. 

“수면 중에 별의 힘, 즉 아스트랄계에 너무 심하게 몰입하는 인간은 땅의 임무에 점점 더 무력해질 위험이 있다.”

영성, 고차원의 인식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자주 ‘중독’을 경계하라는 조언이 나온다. 정신을 쫓다보면 일상이 사소하게 느껴지기 쉬우니 말이다. 어쨋거나 인간은 죽음 이전에 땅의 시간을 살아야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할은 정신으로 날아오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땅으로 불러들이는 (기독교 교리로 보자면, 하느님의 세상을 땅으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신선놀음 구경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몰랐던’ 우리나라 옛이야기도 아마 그런 식의 조언이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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