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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동화의 지혜-1] 동화의 의미 / 원초적 지혜의 운명 / 명랑한 지혜 본문
인지학적으로 동화의 의미를 살펴보는 책, "동화의 지혜'를 책모임에서 함께 읽고 남겼던 후기들을 모아 정리해본다. 융심리학적 관점과 민속자료학적 관점이 아닌 인지학적 관점에서 옛이야기를 바라본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시작에서부터 저자는 이 차이를 분명히 한다. '정신의 발원지'에 가닿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성의 촉수를 잔뜩 세우고 있었는데, '영민한 순종'이라는 단어에 얼마나 놀랐던지...책을 읽는 게 겁이 날 정도였다.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이젠 조금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다. 내 안에 남겨진 질문들이 있으니 그것들을 잘 품고 탐구하며 가보려고 한다. 동화들이 길을 밝히고 앞에서 기다려줄테니.
[동화의 의미]
- 백설공주 / 빨간모자 / 개구리 왕자 / 별별털복숭이 / 장미공주 / 재투성이 아셴푸텔 / 흰눈이와 붉은 장미
18세기 이성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인류의 '지성적 성숙의 시기', 사춘기가 시작된다. 이 과정을 통과하고 상상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면서 "인간은 자신을 경직시키고 영혼을 노화시킨 것이 지성이었음을 알아차린다." 바실리사가 바바야가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자 바바야가가 "호기심이 너무 많으면 빨리 늙는다."고 이야기한 것이 떠올랐다.
'상상의 인식단계에 이르는 것은 유년기의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했지만, 유년기의 상상과 지성적 사춘기를 통과한 어른의 상상은 다를 것 같다. '마법에 걸리고, 마법에서 풀려나면', '마법을 본질을 살아내는 것'으로 이어지는 건 아닐까...상상의 인식 단계로 잘 들어가고 싶다.
"모든 동화에는 공통적으로 태곳적 신앙의 흔적, 즉 초자연적 사물의 형상 인식이 들어있다. 이 신비는 웃자란 풀꽃들 아래 점점이 흩어져 있어서 밝은 눈에나 띄는 산산히 부서진 잘디잔 보석 파편과 같다. "
"영민한 순종"
"한 영혼에서 직관적 확신이 생성되는 길은 오랜 시간을 기울여 이미 있는 것에 집요하게 녹아들어가 상상력의 귀중한 유산을 행여 다칠세라 보살피는 것이다."
"우리는 초자연적 차원을 발현케하는 내적 출발점을 찾아내는 것이 늘 주안점이었고, 줄곧 상상력이 어떤 의식 상태에서 나래를 펴는지 더듬는데 매달려왔다."
"마음 속에서 기본 정서와 의미있는 출발점을 재건하는 정신 추구의 길은 동화의 형상을 상징으로 해석하는 길과는 판이하다."
"상상력이 정신의 발원지에 가 닿으면 영혼이 말랑해지고 결국 동화 속 형상들의 얼개나 상황을 내면에서 다시 구성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지금 모티브 구분으로 옛이야기를 분류하고 상징과 의미를 뽑아내는 공부법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분석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원형적 상징 개념으로 옛이야기를 살펴보고 있기도 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건뎌서 나에게까지 닿은 이야기라면 분명 절박하게 인류에게 전하고픈 메세지가 있을 꺼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집어든 것도 그 맥락이었다. 마치 외계인의 신호를 찾는 천문학자처럼, 분명 있지만 아직 나만 모르는 그것을 알고싶어서..그런데 저자는 전혀 다른 접근을 이야기한다. '내적 출발점', '정신의 발원지'에 가닿는 것이라니! '의미의 정복'이 아닌 '영민한 순종'이라니! 쏟아질 정보들을 가득 받아내기 위해 커다란 바구니를 든 채 잔뜩 긴장했던 나를 무장해제시킨다...조금 겁이 난다.
[원초적 지혜의 운명]
- 라푼첼 / 거위지기 아가씨
"동화는 모든 문명과 민족 문화의 출발점인 '신비로운 계시'의 마지막 잔향이며, 인간 존재의 숭고한 근원에 대한 예감에 찬 기억이다."
"예감은 태곳적 정신의 유산이다. 내면에서 선조들의 경험이 떠오르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원초적 지혜가 희미해지고 피에 담긴 혜안의 힘이 사멸될 때 개인이 깨어난다...실향은 자기 영혼 속의 영원성을 일깨우는 과정이다."
"요한묵시록의 네 기사(흑사명, 전쟁, 기근, 죽음)는 인간 지성 발달 단계의 반영이다.
"생각에 작용하는 의지의 방향이 결정적 관건이 된다."
저자가 태곳적 정신의 유산이라고 한 '예감'은 '직관'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예감은 '미리' 느끼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지만 직관은 논리를 거치지 않은 '연결'에 중점을 둔 단어이기 때문이다. 난 그 정신성에 대한 직관을 살리고싶다. (이 의문에 대해서 모임지니님께서 '육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다는 말씀을 주셨다. 육감이라고 하니 더 잘 이해가 되었다. 태고적(본능적?) 예감에서 논리적 이성, 그리고 정신적 직관으로...그 흐름은 마치 꼬리를 문 뱀같은 회귀인 듯 하다. 비슷하지만 같지않고 오히려 뛰어넘은 상태. 혼란스러웠던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난 내 몸이 진화적 과정의 산물이듯 내 내면 또한 그렇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류가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이 내 안에 남아있고, 내가 만들어가는 순간들이 모여 미래 인류의 진화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인간 지성의 발달에 의지의 방향이 결정적 관건이 된다고 했다. 방향을 거스르고 세우는 힘으로 보통 여겨지는 '의지'가 '영민한 순종'을 선택하는 것이 모순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것. 그것이 현 인류의 과제처럼 보인다.
실향이 영혼 속의 영원성을 일깨우는 과정이라는 문구에서 '인류의 가장 긴 실향기'라고 할 수 있는 구약성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또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과도 이어서 생각해보게 된다. 인류는 고향을 잃고 헤매면서 성장하고, 결국 다시 귀향하게 되는거겠지..
영혼이 자기근원을 기억해내 드높은 소임을 깨닫는 것, 영원한 자아를 아는 것. 이러한 자각은 인간 대 인간으로 전해질 수 없는 신비로움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내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내 소명이 무엇인지 알지못해서 사람들은 우울해하고 방황한다. 단순하게 '내가 뭘 원하는지'에서부터 시작하려하지만 이조차도 어렵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것이라는 걸 깨닫는 건 세상에서의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태고적 신비에 가 닿아야 가능한 것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함께 읽고 있는데, 다른 형식의 문장이지만 [동화의 지혜]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와 비슷한 점이 느껴진다. 이성인류를 대표하는 주인공은 삶 자체를,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조르바에 매료당하는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정점이 '신성한 경외감'이며 그 순간 '시'가 시작된다고 말한다. 생각과 노력 이면에 우리를 이끄는 운명의 힘을 깨닫기 위해 헐벗는 과정을 인류가 (그리고 내가) 잘 감당할 수 있길..
[명랑한 지혜]
- 하늘나라에 간 재봉사 / 용감한 꼬마 재봉사 / 영리한 재봉사 이야기 / 거인과 재봉사
"재봉사는 모든 것을 잘라 제멋대로 이어 붙이는 독불장군 지성이다. "
"구원자는 '유머'다. 유머는 매몰된 자기 자신으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게 도와준다. "
"동화가 제시하는 시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류가 전승과 교리에 만족해야 하는 시기, 곧 계시가 끊긴 시기."
"모든 문제에 대한 깨우침이 더는 위에서 직접 주어지지 않을 때, 능동적 사고의 힘이 비로소 전개된다 삶의 수수께끼를 철학적 사고를 통해 자기 힘으로 풀려는 욕구는 신과 멀어진 상태. 즉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 본격적으로 꽃필 수 있었다. 이것은 성 베드로 시대를 의미한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인간의 머리는 본성상 손발과 달리 세상에 대해 '도벽'의 관계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초감각의 세계에서 통하는 것은 생명(심장의 피, 정열)을 치르고 얻은 지혜뿐이다. 지식의 빛은 온전한 경험의 온기가 스미지 않으면 더 높은 세계에서 빝이 되지 못한다."
"지혜를 개념으로밖에 바꿀 줄 모르는 사람, 즉 지혜를 내면에서 작동시키지 못하고 지혜가 갖는 변화의 힘을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가련한 요괴로 남게 된다."
명백하게 정의롭지 못한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신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었겠냐며 분노한다. 죄없는 아이들이 죽거나 힘없는 존재들이 학살당할 때 우리는 정의의 심판자를 원망하며 허무주의에 빠진다. 마치 보상에 길들여진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행동의 이유가 보상이어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세계정의는 원인과 결과가 직결되는 인과법칙이 아니라 큰 시간간격이 있다고 말한다.
"인식이 초조함을 이기고 시간의 흐름을 신뢰로 맞아들일 때에야 운명의 법칙은 인식된다."
시간을 믿는 것, 부모가 되면서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되었다. 당장 내 눈 앞의 아이가 보여주는 행동 하나에 절망하고 환호하며 아이의 삶을 어느 시점에 성적표가 매겨지는 평가로 바라보게 된다.
마침 며칠 전에 [하늘나라에 간 재봉사]를 둘째에게 들려주었는데, 그 날 저녁 나는 꼬박꼬박 삐딱선을 타는 아이에게 분에 못이겨 빨래더미를 던졌었다. 잠자리에 누워서 이 일에 대해 사과하면서 '엄마가 재봉사랑 비슷하다. 널 판단하고 빨래던졌네.'라고 하자 둘째는 '엄마가 재봉사처럼 천국으로 못오면 어떡해'라고 하며 오열했다. ^^;; "엄마가 천국 갈 수있게 지금부터 잘 할꺼야~"라고 했지만 '지혜를 개념으로밖에 바꿀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확신이 안섰다. ;;
'성 베드로의 시대'가 이성의 시대로 상징되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성경에서 보기엔 사도들 중 가장 감정적이요, 충동적이어서 비이성적 캐릭턱로 생각된 게 베드로였기에. ㅎ
"거인의 힘은 아틀란티스 시대의 의식이다."
"재봉사가 성공을 거둔다면 우둔한 거인과 왕들에게는 없던 자의식의 확신이 성공의 답이다."
"지적 인식은 확산하려는 자체 동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
"공주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공주와 결합하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천상에 속하는 무엇인가를 자기 내면에서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동물은 인간이 되겠따는 드높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신의 자식으로서 누리는 찬란한 자유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정신이면서 육신인 자신의 존재를 시시각각 되돌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중력에 붙들려 있는 모든 것이 몽상가에게 반기를 들고 그를 중력의 깊은 수렁으로 끌어내릴 것이다."
"야생의 거친 힘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려면 유머와 창의력이 있어야 한다."
"음악은 리듬과 예술적 감각 활동의 삶을 말한다. 육중한 땅의 힘인 중력은 음악을 통해 정신의 차원으로 올라가려 한다. 이렇게 상승하지 않으면 감각적 본성을 업신여기는 자에게 해를 가할 것이다."
육신, 지적 인식,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인간은 정신이면서 육신이고 이 둘을 잘 돌보아야한다. 육적인 땅의 힘은 '리듬과 예술적 감각활동'을 통해 정신의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상승하지 않으면 그 힘에 의해 해를 입을 것이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예술, 리듬을 강조하는 것이 이런 의미인걸까?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말보다 춤과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조르바가 떠올랐다. 본능적이고 쾌락추구형이면서도 그가 지적인식의 총아인 주인공보다 정신적이며 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조르바가 '중력'을 예술활동으로 정신의 차원으로 올려서인 듯!
오늘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주인공은 조르바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필연의 미로에서 자유로 나아가고 '우주의 진리를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지상 최초의 인간이 가졌던 영혼'으로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영혼이 작동하자 '거대한 확신'에 불안해하며 영혼의 날개를 자르고 이전의 평정으로 돌아가버린다. 벗어나고자 인식하더라도 익숙한 것만큼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은 없나보다. 참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조르바는 유언으로 주인공에게 자신의 산투르(악기)를 남겼나보다. 예술이 주는 영혼의 선율이 없다면 중력에 제압당하리라는 이야기가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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