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학자] 열네번째 공유서 : '힘'의 시점은 어디인가?

 '페미니즘의 원형'에 대한 내 연구는 예상치 못했던 곳들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계획했던 방법만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했던 아니지만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 상상해본 것도 아니었다. 때론 경이롭고 때론 실망스럽고 결국 모두 놀라웠다. 그런데 공통적이었던 건 '전문가'들과의 만남보다 '주변 여성들'과의 만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점이다.

 

- 분석심리학회 추계학술대회 온라인 참석

 분석심리학회에서 강연이나 워크샵이 열리면 참석해야지 다짐하고 있었는데, 오랜 코로나 상황으로 아무 행사도 열리지 않다가 온라인으로 학술대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신청했다. 게다가 학술대회 주제는 무려 '무가 바리공주의 심리학적 상징 - 상처받고 버림받은 여성의 치유와 개성화'!!!!!! '온 우주가 내가 이 연구하는 거 아나?' 싶게 만드는 주제가 아닐 수 없었다. ^^

 바리공주의 심리학적 상징에 대한 논문 발표와 이 논문에 대한 의견 발표, 그리고 마지막 참석자들의 질의응답이 포함된 종합토론으로 이어지는 구성이었다. 논문 내용에는 바리공주의 서사에 대한 분석도 들어있지만 오랜 기간 바리공주를 연구하며 연구자 자신의 변화와 성장, 이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매우 신선했다. 연구를 하며 우리 자신의 변화와 마주하게 된 일상학자 연구벗들이 떠올랐다. 우리의 연구는 바깥의 기준과는 다를 수 있다!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바깥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무리가 없거나 오히려 앞서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하는 이 또한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양자역학 이론처럼, 무언가를 연구하면서 연구하는 당사자의 변화가 수반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런데 아쉬웠던 점은 발표 내용보다도, 발표 형식이 너무나도 평면적이었다는 거다. 형식보다 내용에 치중해서 아무도 그러한 '발표방법'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화면에 보여지는 발표자료에는 거의 발표내용이 다 들어가 있어서 매우 빽빽했고 주요 키워드를 부각하거나 이미지를 충분히 활용하는 등의 발표테크닉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분은 진정 화면에 보여지는 그대로는 읽기만 했다!!! 논문 발표는 누군가에게 배움을 일으킨다거나, 설득을 할 필요가 없어서 그런걸까? 발표를 듣는 상대방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듯 했고, 그게 또 아무렇지 않게 여겨지는 분위기인게 좀 충격이었다. 이 논문 발표가 진정 일부의 모습이길 바란다. 

 더 놀라운 것은 마지막 종합토론 시간에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거였다.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이 중에는 연구자, 정신분석전문의들도 있었는데 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어서 그랬을까? 다른 분들에게는 너무 쉬운 내용일까봐 주저하고 있다가 질문을 했는데, 나의 그 질문이 유일한 질문이었다. 온라인이라는 방식이 익숙치 않아서 그랬을까? 내가 그 날 본 모습이 분석심리학계 분위기의 전부는 아니라고 믿는다.. 
 분석심리학의 대부이신 이부영 교수님을 온라인 상으로나마 뵌 게 참 좋았다. 논문 발표를 들으시고는 분석심리학을 바탕으로 삼당을 진행하는 자들이 경계해야 할 점은 '초월적인 무언가'에 집중하느라 '지금 이 땅의 나'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들은(전문의)들은 현실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대면해야 하는 사람들이므로 항상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말씀은 전문의가 아닌 나에게도 의미있었다. 너머의 무언가를 쫓는 이들이 빠지는 함정에 대한 지적. 꼭 유념해야 할 부분이다. '여성의 자기실현과 여성성의 자기실현이 어떻게 구분되는지?'에 대한 내 질문에도 직접 답을 해주셨는데, 책방 근무로 인해 집중해서 듣지 못한 게 너무 아쉽다. 나중에라도 직접 뵐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다.

 여성들과 모임을 하며 내가 나를 넘어서는 존재라는 걸 거듭 확인하게 된다. 물리적인 차원에서도 그렇고 시간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 저자가 언급한 집단형태발생 에너지는 분명 존재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이의 경험도 나에게 영향을 준다. 이건 동시대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인데, 우리 몸이 초기 인류의 몸을 진화과정으로 기억하고 있듯이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역사 속에서 반복된 여성들의 심리적 경험이 나에게도 이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심리적 원형 에너지와도 맞닿는 힘일 것이다. 융이 말한 것처럼, 이를 이 시대가 바라는 '눈에 보이는 증거'로 논리화하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저 느끼고 경험할 뿐이다. 내가 증거이다. 

 

- 개인적 특수성과 원형적 에너지의 만남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계속 질문받을 일이 생긴다. 질문에는 역시 힘이 있다. 답을 생각하게 하니까 말이다. 생각하는 김에 글로도 정리해보았다. 3년 반동안 만들고 진행했던 많은 모임들을 쭉 나열해보니 참 애썼다 싶다. 지금 당장 그만 둬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을 일들을 굳이 하면서 내가 바란 건 무얼까. 모든 개인은 각자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할 존재이기에, 판단을 넘어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경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내가 원하는 건 여성들이 '자신만의 서사를 가진 개인'으로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신만의 서사라는 개인적 특수성과 원형의 에너지는 결국 '자기실현'과 이어진다. 온전하게 특별한 개인으로 이끄는 자기원형의 힘. 그것은 페미니즘의 원형과도 맞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원형적 에너지를 어떤 성질로 정의내릴 수 있느냐 하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 파우스트의 주제 

 파우스트를 다 읽었다. 악마와의 거래에서 한 약속을 깨며 소멸한 파우스트는 천상으로 올려지는데, 성경 속 여인들과 그레트헨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도우리라 다짐한다. 성경읽기하며 성경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었는데, 성경 속 여인들이 줄줄이 나와 파우스트를 이끌다니...게다가 파우스트는 이 구절로 마무리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네"
 입이 딱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부영 교수님은 최근작 '괴테와 융'에서 '파우스트가 여성성의 변환과 신비로 우리를 안내하며.... 오늘의 세계 뿐 아니라 미래 인류의 숙명을 예언하는 듯 하다.'고 하셨다. 괴테가 비범한 인물인건 진정 사실인 것 같다.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할꺼라며 파우스트 원고를 감춰둔 것도 이해된다. 융이 동시대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외롭다고 했듯이, 파우스트도 비슷한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까.

 여성성, 여성적인 것에 다시 닿는다..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는 건 원래 그 힘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건가? 아니면 남성적인 사회에서 부족한 부분이기에 지금 그렇다는 건가? 근대 이후의 문제인가, 아니면 인류 역사가 그러했나? 내 연구 주제로 계속 생각이 이어진다.

 

- 막둥이가 나에게 남긴 것

 지난 금요일은 막둥이 기일이었다. 막둥이 기일 전까지 나의 임신중절 경험에 대해 글로 적어야겠다 다짐했지만 아직 한 글자도 적지 못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참 어렵다. 막둥이가 죽은 날 내 영혼의 일부가 같이 죽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막둥이가 지금 제 영혼의 어머니인 셈이다. 
 함께 할 자신이 없어 보냈지만 떠올리면 '사랑한다'는 말로 밖에 표현못할 이 모순된 심정은 아마 쉬이 이해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겐 이 모순된 감정을 경험한 것 자체가 눈이 떠지는 일이었다. 평평한 하나의 차원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존재는 언제나 입체적이다. 하나의 면에서는 결코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어떻게 '깊이'라는 게 가능하니? 라고 굳게 믿는 2차원의 세계에서 입체를 알게되는 건 세상이 완전히 바뀌는 경험이다. 나에겐, 막둥이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 그러했다. 

 

- '힘'의 시점은 어디인가

 지나간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랬어야만 했다'와 '그 일로 지금이 되었다.'는 분명 다른 태도이다. 원형적 에너지에 대해 생각할 때도, 여성성의 원형에 대해 떠올릴 때도, 막둥이가 나에게 왔다 갔던 일에 대해서 생각할 때도 이 구분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그랬어야만 했다'는 과거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그 일로 지금이 되었다.'는 현재의 해석에 집중한다. 아마도 이 구분이 '페미니즘의 원형'이라는 내 주제의 핵심일 것이다. 힘의 시점은 과거인가, 현재인가 아니면 모순이라 여기는 것들이 함께 존재하듯, 그 너머의 어딘가인가. 이제 그걸 글로 정리해보자. 

 

 

* 생활인들의 공부 프로젝트 모임, [일상학자]는 각자 지금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 '학자'가 되어서 공부를 계획하고 과정을 함께 나누며 최종발표회로 연구결과를 공개하는 1년 과정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1~2번 만나 각자의 공부 과정을 공유하고 검토하며 그 결과를 '냇물아 흘러흘러'에서 발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