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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내 안의 여신찾기] 상처와 성장이라는 모순 속의 가치 본문

내 안의 여신찾기/여신모임 4기 2019 가을

[내 안의 여신찾기] 상처와 성장이라는 모순 속의 가치

고래의노래 2019. 11. 29. 15:20

 이번 주에는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에서 '상처받기 쉬운 여신들'을 읽고 만났습니다. 헤라, 데메테르, 페르세포네는 누군가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정의내리는 관계지향적 여신들로 여성의 생애주기 안에서 아내, 엄마, 딸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관계 속 상대의 태도와 상태에 심하게 영향을 받으며 이는 때론 벅찬 희열로 때로는 끝모를 비탄으로 이어지지요. 그래서 이 세 여신 원형은 가장 큰 에너지를 가졌으면서도 매우 취약해질 수 있습니다. '상처받기 쉽다'는 것은 이렇게 바깥을 향해 분산된 주의력이 가진 강점과 단점을 모두 내포한 말입니다.

::결혼이 우리에게 준 깨달음

 헤라는 제우스의 아내로 결혼과 아내의 역할을 상징하는 여신입니다. 누군가와 짝을 이루는 것을 '완성'으로 여기며 결혼관계를 흔드는 상황이나 대상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을 피울 때마다 제우스가 아니라 상대여자에게 분노하는데, 심지어 그것이 제우스의 일방적인 범죄행위일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는 헤라가 중요시한 것이 남편 자체라기보다는 '결혼'이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내가 되고 싶은 욕구'는 헤라 원형의 힘을 대표하는데 때로 이 욕구에만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상대방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결혼을 결정할 즈음을 돌아보며 헤라 원형이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대부분 결혼은 '아내가 되고 싶은 내면의 욕구'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타이밍'에 이끌린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혼적령기에 결혼이라는 과업에 대한 의무감이 올라오기도 했고 심리적으로 외로웠거나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나이와 맞물려 결혼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지기도 했지요. 그 시기 나를 주요하게 지배했던 원형의 영향이 결혼 결정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미래 시댁식구들과 자주 만나고 알아가면서 가족으로의 스며듦을 헤스티아처럼 따뜻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사랑하지만 불편한 미래가 뻔히 보이는 상황에 대해서는 아테나처럼 단호하게 내 생각을 전했지요. 관계를 끊을 수 없기에 결혼을 거부하지 못하고 페르세포네처럼 끌려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결혼을 결정할 당시 끌렸던 남편의 매력이 지금은 어떠한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어요. 감성적이고 이상주의자인 내가 이성적이고 현실주의자인 남편의 성향을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했던 건 그 때의 나에게 그러한 점들이 필요했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소통되지 않는 느낌때문에 힘들었지요. 반대로 나와 비슷한 사람이기에 선택한 것 같은데 지금은 그 점 때문에 자주 부딪혔습니다. 결혼의 전의 남자친구와 결혼의 후의 남편이 완전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어요. 융은 누군가에게 반한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통합되어야 할 부분을 상대에게 투사하여 끌리는 마음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변한 건 우리 내면이 변했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그 주요한 변화는 임신, 출산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나를 알아간다

 데메테르는 돌봄과 어머니 역할을 상징하는 원형입니다. 생명이 움트고 자라게 하는 대지의 여신이기도 하지요. 데메테르는 딸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의 신 하데스에게 납치되었을 때 정신없이 딸을 찾아헤매며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그 때 땅 위의 모든 생명은 힘을 잃고 바스라집니다. 데메테르 원형의 영향을 받으면 임신을 원하거나 자녀를 돌보며 충만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힘을 의식적으로 쓰지 않으면 관계 속의 모두에게 파괴적일 수 있지요. 돌봄대상과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해야 서로의 건강한 성장과 독립이 가능해집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지나치게 통제하거나 과도한 애정으로 지나치게 허용하면 양 쪽 모두에게 내면의 빈곤함을 야기하게 됩니다

 엄마 역할을 하며 오르락 내리락 하는 감정의 부딪힘 속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 모습을 반영하는 아이를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 채우지 못했던 욕구를 아이에게 투사하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지요. 새로 태어난 돌봄대상과의 역동적인 관계맺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겪고 배우고 변화했습니다. 결혼을 결정했던 그 시기는 어쩌면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한 시기였는지도 모릅니다. 어느 정도의 업무경험, 어느 정도의 연애 경험을 넘어 새로운 도전이나 성장의 도약 같은 삶의 변곡점이 필요하다는 내면의 욕구를 결혼이라는 이벤트로 해소한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내면의 변화를 거치며 우리가 느끼는 안타까움, 분노, 답답함은 어떠한 신호로 해석해야 할까요.

::우리 자신에게 이상적인 부모가 되어주기

 데메테르의 딸 페르세포네는 연약한 수동성을 상징합니다. 꽃밭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이 하데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납치되지요. 데메테르의 집요함 덕분에 지하세계에서 풀려나지만 나오면서 석류알을 몇 알 받아먹어서 일 년 중 몇 달은 지하세계에 머물러야 하는 운명이 됩니다. 하지만 그 덕에 죽은 이들을 이끄는 지하세계의 여왕이 되지요. 이러한 다이나믹한 서사로 인해 페르세포네는 줏대없는 불확실성이면서도 가장 큰 성장 가능성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외부적 관계 뿐 아니라 영적으로 열려있기 때문에 신비한 체험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성장을 이루기도 하지요.

우리는 페르세포네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투사하면서 바라는 상을 내면화하고 이를 수동적으로 반영했었지요. 존재 자체가 취약한 시기였던 어린 시절에는 말 잘 듣고 얌전한 착한 아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20대 초에는 연애감정에 대한 갈망으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였지요. 직장 생활 초기에는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만 움직이며 주체적으로 일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매우 다른 모습이고, 과거의 어느 순간들 또한 때때로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성장환경과 상황, 생애주기, 관계의 성격에 따라서 내면의 원형들은 강화되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했어요. 저자는 원형적 충동과 내면의 진짜 욕구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합니다. 임신에 대한 욕구가 때로 새로운 도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성장을 위해서 극복해야 할 지점을 부정적인 내면의 신호로만 해석해서도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둘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시간을 두면서 진정한 욕구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저자가 '이상적인 부모'로 제시하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기질을 너무 강화시키지도 억압하지도 않으면서 믿음으로 성장을 기다려주는 부모, 다양한 경험의 기회를 주되 강요하지 않는 부모 말이지요. 자신에게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과정을 존중해주고 스스로 내린 결론을 믿어주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지금 자신을 대할 때 필요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형과 욕구 사이의 갈등과 긴장

Paula Modersohn Becker <Selfportrait at 6th wedding anniversary>

 위 그림은 파울라 베커의 '여섯번째 결혼기념일의 자화상'입니다. 그는 서양미술사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누드를 그린 여성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릴 때 파울라는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오랜 별거 생활 끝에 남편 오토 모더존과 이혼을 결심한 상황이기도 했지요. 임신하지 않았으면서 임신한 자화상을 그린 이유에 대해서 여러가지 해석이 있지만, 저는 원형과 욕구 사이의 긴장감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사실적인 표현이 지배적인 예술 공동체 안에서도 자신의 심상을 그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유지할 만큼 내면의 힘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엄마역할와 예술가 소명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고 고민했지요. 아이를 원하면서도, 아이를 낳으면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할 수 없을 걸 알았기에 확실한 경력을 쌓고 30살 이후에 아이를 갖겠노라 다짐했습니다. 그러한 내면의 갈등 속에서 그는 '아이와 엄마'를 주제로 계속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고 저 자화상을 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보기 위해 파리로 온 남편과 재회하고 임신을 하게 되지요. 그 후 다시 독일 집으로 돌아와 아기를 낳고 행복해하지만 출산 18일만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원형은 계속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원형적 에너지는 현실 세계를 사는 우리의 상황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조율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지요. 우리는 모두 어떠한 불편함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고, 아이 또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문제이기도 했지요. 우리는 지금 느끼는 감정적 신호가 원형의 충동인지, 내면의 소리인지, 성장을 위해 극복해야 한 불편한 긴장감인지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어떤 성향인지, 내가 처한 상황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지요.

::함께 이야기하는 것의 힘

 바깥의 시선은 때로 진짜 우리 모습 대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나를 파악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못한 것들을 모임벗들이 발견하고 이야기해주기도 했습니다. 나를 좀 더 알게 되자 내 주변의 사람들도 더 이해할 수 있었지요. 나와 부모님의 기질 차이가 만들었던 성장 과정에서의 영향도 분명해지는 듯 했습니다. 페르세포네처럼 유약했던 내가 점점 자기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가 또 누군가에게는 곧바로 다른 모습이 되는 것도 때로 강화되고 때로 억압당하는 원형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도 했어요.
 한 모임벗께서는 요즈음 '가족'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곰곰히 생각하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혈연관계 뿐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관계까지 가족으로 바라본다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이라는 걸 믿으면서 서로의 성장을 바라봐주는 관계'가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어요.

 헤라, 데메테르, 페르세포네 신화는 한주기를 끝내고 새로운 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 고통 속에서 성장하는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서사입니다. 상처받기 쉬운 열린 상태가 성장의 가능성 또한 상징한다는 것이 삶이 가진 모순 속의 가치가 아닐까요. 성장이 모두 고통을 동반하지는 않지만 모든 고통은 성장의 씨앗일 수 있습니다. 상처는 아픔이지만 이것이 나만의 상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견딜 수 있는 힘이 조금 더 생깁니다. 모임 안에서 비슷한 고민들을 나누며 상처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때로 유쾌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열심히 삶을 사랑하며 살고 있는 우리의 성장'을 함께 바라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네요.

 다음 주에는 <우리 속에 있는 여신들>을 마무리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과 현실과의 간극 속 불편함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다음 주에 '아프로디테'와 함께 창의적인 방법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내 안의 여신찾기]는 서울 세곡동 <냇물아 흘러흘러>(https://band.us/@natmoola)라는 공간에서 12주동안 진행되는 내면여행 모임입니다. 2권의 여성주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며 내 안의 힘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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