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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 더하기] 무엇을 보면 가슴이 뛰나요

고래의노래 2019. 11. 6. 12:49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2부에서는 관계를 중심으로 야성의 심리를 이야기합니다. 연인관계, 부모자식관계, 나와 야성의 관계 사이에서 우리가 지켜야할 것은 무엇이고 버리고 돌아서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여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쌍둥이 자매를 아내로 얻은 마나위'는 배우자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마나위라는 남자가 쌍둥이 자매에게 청혼을 합니다. 자매의 아버지는 자매의 이름을 알아오면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하지요. 고민하는 남자를 위해 마나위의 개가 여러 시도 끝에 갖은 유혹들을 물리치고 자매의 이름을 알아내게 되고 마나위는 쌍둥이 자매와 결혼하게 됩니다.

 저자는 쌍둥이 자매를 여성의 내면에 있는 양면성으로 보고 마나위가 자매의 이름을 알아내는 것을 여성의 양면성을 모두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옛이야기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은 능력자를 불러내거나 나를 괴롭히는 상대의 능력을 사라지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은 존재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이름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말이지요. 우리가 쓰는 많은 언어들은 그 실체를 나타낸다기보다 사회가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남성중심사회의 언어는 특히나 여성에게 해롭습니다. 많은 언어들이 여성을 대상화한데다 여성혐오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언어를 찾는 것은 모호했던 것들이 명확해지면서 자기 것이 되는 사건입니다. 마나위 이야기를 읽으며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다시 이름붙히는 노력을 계속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네요.

 생각해보니 우리의 배우자들은 내가 알지 못했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마나위처럼 본질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 자기 안에서 통합하지 못했던 내면의 반대쪽을 상대를 통해 확인하게 된 경우이긴 했지만요. 남편과 연애를 하며 내가 무시하고 있던 내 안의 여성성이 발견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관계 안에서 그 면만이 강화되고 갇히지 않게 경계해야겠지만 그 당시에는 분명 필요한 일이었지요. 저자는 배우자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당신은 무엇을 원하는가? 당신의 자아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을 해야한다고 말해요. 그리고 그렇게 알게 된 본질은 항상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자기 안의 모든 세포가 '도망쳐!'라고 소리칠 때조차
그 사람 옆에 머무는 것이다."

 '해골여인 이야기'는 그러한 양면성을 받아들이고 함께 고난을 극복하는 상징을 가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 죄로 물 속에 빠뜨려 죽임을 당한 해골여인은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나간 어부의 그물에 걸립니다. 어부는 해골여인의 기괴함에 기겁을 하고 어떻게든 떼어내려 하지만 그럴수록 뼈들이 그물에 더 걸릴 뿐이었죠. 온 힘을 다해 집으로 돌아와 이제야 해골여인에게서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어부는 침대에 눕습니다. 그런데 불을 켜니 바로 옆에 해골여인이 누워있었지요. 갑자기 어부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해골여인의 엉킨 뼈들을 가지런히 정리해주고 잠이 듭니다. 해골여인은 알 수 없는 꿈을 꾸며 흘린 어부의 눈물을 마시고 어부의 심장을 꺼내 두들기면서 점차 살이 붙고 생기를 되찾습니다. 그리고 둘은 함께 하게 됩니다.

 저자는 해골여인을 그동안 묻혀 있었던 여성의 삶/죽음/삶의 힘이라고 해석합니다. 강인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둘 사이에 이러한 삶/죽음/삶의 주기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함께 고난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랑은 '인내라는 심리적 힘줄로 이루어진 연대'라고 정의내립니다. 불꽃튀는 열정으로 시작된 사랑은 망상과 탐욕의 죽음을 거쳐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 시기를 '연민'으로 치유하고 '눈물'로 창조해내며 함께 '기다리면' 다시 삶의 시기가 찾아옵니다. 마치 어부가 '측은함'에 해골여인의 뼈를 풀고, '눈물'을 흘리며 '잠'을 자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은 연인 뿐 아니라 부모와 아이, 친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삶/죽음/삶을 경험해보았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야기 속의 여러 상징들을 새롭게 해석해보았습니다. 해골여인은 삶/죽음/삶이라는 사랑의 본질 뿐 아니라 죽음이라는 하강을 통해 남겨질 것만 남겨진 여성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렇게 해골여인을 무서워하던 어부가 갑자기 연민을 갖게 된 것은 안정적인 '집'으로 돌아와 '불빛'을 통해 해골여인의 실체를 확인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연민을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안정(집)은 물론이고 두렵지 않은 실체를 확인하게 해줄 깨달음(빛)도 필요한 것이죠. 우리는 실체를 모를 때 오히려 더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어두움 그 자체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무서운 것처럼요.

 위 사진은 피나 바우쉬의 '보름달'이라는 무용극의 한 장면입니다. 무용과 연극을 결합하여 탄츠테아터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비나 바우쉬는 마음을 울리는 현재무용 연출로 유명합니다. 그는 주로 인간의 삶과 관계, 소통에 대한 문제를 극에 녹여내는데요, 극의 의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면서 해석은 철저히 관객들에게 맡겨진 부분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해요. 극을 완성해가는 과정도 굉장히 유기적인데, 리허설 과정 중에 끊임없이 무용수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표현하게 하고 작품을 완성해갔다고 합니다. '나는 무용수들을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보다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에 더 관심있다고 말했었다고 하네요.

 커다란 바위 옆에서 물줄기를 맞으며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는 삶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분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를 나타내는 것만 같습니다. 누구나 삶/죽음/삶 주기에서 죽음의 시기를 두려워합니다. 죽음의 시기를 거쳐야 삶이 다시 건져올려진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고난을 덜어주지는 못하지요. 저자는 죽음이 마치 낮 사이를 연결하는 밤이라는 연속체와 같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밤이 잠의 시간인 것처럼, 죽음의 시기를 밤으로 본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질문하며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영혼의 노래를 불러야하는지도 모릅니다. 신에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능력을 달라고 기원하면서 말이죠. 죽음의 시기에 나오는 땅이 꺼질듯한 탄식, 몸이 부서질듯한 통곡, 가슴을 쥐어뜯는 몸짓이야말로 바로 그런 노래가 아닐까요. 그것은 연약한 포기가 아니라 붙잡고 지키고자 하는 야성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 크고 하얀 새들에 대한 엄청난 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안데르센의 '미운오리 새끼'는 자기가 속할 곳을 찾아 나 자신을 찾는 여정을 상징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오리 엄마의 모습은 우리가 가진 내면의 어머니를 나타냅니다. 내면의 어머니는 실제 엄마와의 경험을 통해, 또는 어머니 역할을 해준 여성들을 통해 무의식 중에 만들어진 어머니상의 복합체입니다. 융은 어머니 콤플렉스를 여성 심리의 핵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여성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작용합니다. 엄마과의 관계에서 길어올렸던 감정이 계속 남아 영혼의 필요를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생사의 문제로까지 번지기도 하지요.

 날아가는 백조의 모습을 보고 미운오리새끼는 심장이 뜨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우리는 내 원래 모습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의 본능적 자아가 인정받고 환영받는 정신적 가족을 찾은 이들은 소속감으로 생기가 넘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성의 야성을 박해하고 편협한 기준에서 정상성과 성공을 규정한 사회에서 우리 안의 내면의 어머니들은 오리 엄마처럼 사회의 인정과 자기 아이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지요. 그 아이는 자신의 야성일수도, 창착물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야성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무엇을 보면 가슴이 뛰나요. 그것은 힘차게 점프하는 무용수의 모습일 수도 있고 뜨겁게 연주하고 노래하는 음악가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본능이며 이것은 끊임없이 우리 마음을 두드립니다. 모임벗의 마음을 두드렸다는 박정현과 헨리의 노래를 올려봅니다. "Are you happy in this modern world? Is there something else you're searching for?"( 이 세상에서 행복한가요? 다른 무언가를 찾고 있나요?)라는 가사가 제 마음도 두드리네요. 한 무용수가 피나 바우쉬에게 들은 유일한 말은 "미쳐야 해! 더 미쳐야 해!"였다고 해요. 바깥의 시선에 자신을 맞추며 나의 본질을 구겨넣은 모습이 이 시대가 말하는 '정상'이라면 우리는 분명 미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3부(~p321)까지 읽고 만납니다. 나를 흔드는 위태로운 속에서 야성의 여걸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함께 읽어보아요.
https://tv.kakao.com/v/400869332

* [페미니즘 더하기] 10주간 3권의 책을 읽으며 의학, 종교, 심리분야를 페미니즘의 필터로 살펴보고 인간, 여성 그리고 우리자신을 이해해보는 책모임입니다. 부분 참여나 특정책만 참여도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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