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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 더하기] 종교 안에서 권위를 가지고 상상해보기

고래의노래 2019. 10. 23. 14:58

 '페미니즘 더하기' 여섯번째 모임에서는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을 마무리하며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나를 살리는 종교'를 상상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종교의 의미, 우리가 종교로부터 원하는 것 그리고 종교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등에 대해서 이야기나누었어요.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새롭게 만들기

 

 페미니즘 신학의 여러 갈래 중 저자는 '전통의 재구성'에 주목합니다. 역사문화적 맥락 속에서 성경을 바라보며, 전통 중에서 지켜나가야할 '정통'은 무엇인지 가려내고 삭제된 부분들은 상상하면서 새롭게 전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입장이지요.

 '재구성'의 관점에서는 여성을 순종적 도구로 왜곡한 대표적인 상징으로 성모마리아를 보는 대신 자신의 믿음에 따라 신앙에 동참한 적극적 참여자로 해석합니다. 가난하고 평범한 소녀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회적'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성, 순결에 대해서도 다르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은 서로 안의 하느님이 전달되고 스며드는 신비이며 성관계는 이 신비를 감각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하지만 감각 자체를 죄로 여기며 몸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는 존재 안에서 통합적으로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저자는 혼전순결은 남성 중심 가계혈통을 지키기 위한 가부장적 성통제윤리라면서 더이상 결혼이 보편적 선택이 아니므로  순결을 재정의내릴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해요. 결혼 후냐 아니냐의 제도적 용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소비의 대상이 아닌 존재로 마주보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너를 향한 순도 100%의 사랑'을 순결이라고 정의내립니다.

 

 교리에 대해서도 '재구성'의 관점은 다른 해석을 보입니다. 교만이 죄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남성 경험에 기초한 것이며 여성들에게는 오히려 자기포기와 자기정체성의 결여가 죄라고 이야기해요. 예수님의 자기부인은 또한 자기포기가 아니라 주체적인 결단이었으며, 목소리가 차단당했던 오랜 역사를 통과한 여성들은 이제 주체적으로 자기를 갖는 일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분노도 새로운 기독교윤리덕목으로 제안합니다. 성경 안에서는 관계를 깨뜨리는 분노를 금기시하지만 관계성이 이미 왜곡되어 있을 때는 이를 바로잡으려는 분노가 필요하며 이는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재해석한 부분은 특히 저에게 인상깊게 다가왔습니다. 미사 중에 계속 언급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에서조차 불편함을 느끼면서 언어가 갖는 힘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해석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이 사람들에게 아버지처럼 가까운(모임에서는 '아버지가 과연 가까운 존재인가?'에 대한 물음이 또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인격적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종과 달리 아들은 저항할 수 있으므로 인간의 주체성이 인정되는 긍정적인 변화였다는 설명이지요. 그런데 '재구성'의 관점은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왕이 백성들을 통치하던 시대에는 왕과 백성들 사이에 분명한 위계가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인간 왕의 권력이 상대화되었습니다. 아무리 인간 왕이라도 하느님 권위 아래에서는 함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이 신앙이 율법에 복종하는 수동적 신앙으로 변질되자 예수님께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칭하게 됩니다. 이것은 인간 왕들에게 그랬듯이 인간 아버지들을 상대화시킵니다. 아버지가 한 분이시니 인간들은 모두 형제자매이며 인간 아버지들에게 부여된 가부장적 권력을 거부할 권한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의 위계가 없어지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위계만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위 그림은 <빅 마마, 세상을 만들다>라는 그림책입니다. 성경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하느님 '어머니'를 주인공으로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그 하느님은 아기도 있는 진짜 '엄마' 하느님이지요. 빅 마마는 세상을 만들 때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매우 거침이 없습니다. 어둠과 빛, 해와 달, 별, 초록 들판과 열매 등을 창조하며 흐뭇해하지만 여전히 창조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게다가 빅 마마는 아기도 돌보고 설거지와 빨래도 해야하지요. 그래서 한번에 일을 처리하기로 하고 대폭발 한 번으로 온갖 생명을 창조합니다. 모든 것이 보기에 좋았지만 말벗이 없어 외로웠던(아기는 맘마, 찌찌밖에 못해서 대화를 나눌 수 없다고 나와요. ^^) 빅마마는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합니다.

 

 처음에는 빅 마마가 가사일을 하는 모습으로 나오는 것이 아쉽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번 보다보니 살림이 '창조의 하느님'이 원래 하시던 일이며 어찌보면 하느님도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일이라는 메세지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여성으로 보는 시도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을 왕으로 보았다가 아버지로 부르며 관계의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그 변화는 신과 나 사이의 관계변화이기도 하지만 그 당시 사람들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깨기 위한 시도로 볼 수도 있겠지요. 왕의 권력을 상대화시키고 아버지의 권력을 상대화시킨 후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남녀사이의 불균형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이기에 여성들이 종교 안에서 배제되고 위계에서 밀려나고 있다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하느님을 어머니로 부르고 상상해보는 것도 우리가 해볼 수 있는 여러 시도 중 하나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여러 상징과 교리를 새롭게 재구성해내는 것이 가능하다면, 눈 앞에 고정되어 박힌 듯한 성경의 문구들은 페미니즘적으로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요? 저자는 성경 속의 여성 리더십을 찾는 것부터 제안합니다. 미리암이나 드보라같은 여성 지도자나 적장을 죽인 야엘, 율법에 저항한 슬로브핫의 딸들 외에도 성경에서 불순종의 표본으로 그려지는 와스디 여왕이나 하느님과 대척점에 있는 듯한 토착종교 속 여성들에 이르기까지 성경 속 여러 여성들을 주체성의 측면에서 해석해보라고 이야기합니다.또한 당시 문화 속에서 성경 속 이야기들이 무슨 의미였는지 살펴보면서 수용 여부를 결정하라고 말하지요. 그리고 선과 악이라는 단순구도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관계망 속에서 과연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혹은 그 구별이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를 살리고 해방시키지 않는 본문이라면 매여있지 말 것을 제안하기도 해요.

 

종교와 삶의 관계는 무엇일까

 

 우리는 종교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근본적인 질문을 꺼내보았습니다. 존재에 대한 혼란스러움 속에서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그래서 어딘가에 기대어 위로받고 버틸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종교의 문을 두드리고는 합니다. 때로는 벅차는 경이로움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다 종교를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견디기 위해 기대는 것이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생명과 죽음은 그래서 종교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경험했던 죽음과 삶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종교적 의례와 의식에서 위로를 받으며, 장례의식은 죽은 자보다도 살아있는 자들을 살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반대로 남은 자가 처리해야하는 제도적 과정에서 상처받고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배려받지 못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떠난 사람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면서 죽음이 존재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떠난 이들은 우리의 존재로 스며들었고 남겨진 사람들 각자의 삶 속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떠나서도 그들은 우리의 존재가 다듬어지고 세워지는데 여전히 참여하고 있었어요. 종교 안에서 우리는 그 과정들을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자기실현은 우리의 과제이지만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먼지이면서 우주 전체이고 그래서 가능성을 긍정하면서도 한계를 받아들여야하지요.  이 사이 사이의 긴장과 혼란에서 위태롭게 균형을 잡으며 우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기독교와 페미니즘 사이에서 균형잡기

 

 기독교와 페미니즘이라는 긴장 속에서도 우리는 균형을 잡아보려고 합니다. 저자는 페미니즘으로 종교를 만나는 것은 내가 권위를 가지고 상상해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을 믿고 공동체 안에서 피드백 받으면서 나의 방법으로 성경읽기를 실험해보라고 독려하지요. 페미니즘은 우리가 성찰없이 따르던 관습에서 벗어나 '상상'하게 합니다. 존재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말이죠.

 내가 스스로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여성에게 두렵게 느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개별적 주체이지만 시대의 영향 속에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한국사에서 기독교의 여성해방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여성의 교육과 사회참여가 기독교 도입과 함께 가능해지면서, 자신에 대해 주체적 삶을 꿈꾸고 가정이 아니라 공동체에 기여하고자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역사 속의 한국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한편 결혼과 가정을 낭만화시킴으로서 여성들을 옭죄는 문화로도 역할했지요. 그리고 그것은 아직까지도 유효합니다. 의식적으로 거부한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속한 시대의 영향을 받습니다. 가부장제를 거부하지만 남성중심의 언어 문화까지 거부하려면 아예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일베문화가 어이없는데 생각없이 유행어처럼 쓰던 단어가 그 곳의 용어라는 걸 알게되기도 했지요. 그래서 우리는 되묻고 성찰하며 내 언어를 세울 수 있어야합니다.

 

 여성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저자는 버스 에피소드를 이야기합니다. 벨을 눌러도 버스가 서지 않고 정거장을 지나치려 하는데 한 아가씨가 너무나 작은 소리로 "저기요"했다는 거예요. 저자가 "더 크게!"라고 크게 소리질러서 그는 더 큰 소리로 버스기사에게 이야기했고, 결국 내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웃픈 이야기입니다. 여성이라면 거의 한번씩은 겪어봤음직한 일이지요. 저자는 이처럼 여성들이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말하는 연습을 일상에서 할 필요가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나를 살리고, 너도 살리는' 종교를 꿈꿉니다. 서로의 존재가 존중되는 균형있는 관계를 통해서 나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한계를 알아가며 나라는 존재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말씀이 결국은 '살아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라면 이는 페미니즘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나를 믿는 건 어쩌면 나보다 훨씬 큰 신을 믿는 것 아닐까요. 내 존재의 기공성을 통해 내가 다가가는 만큼 나에게 스며들 '커다란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걸 테니까요. 이제 종교 안에서도 권위를 가지고 '상상'해봅니다. 먼지인 나는 우주의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요.

 

* [페미니즘 더하기] 10주간 3권의 책을 읽으며 의학, 종교, 심리분야를 페미니즘의 필터로 살펴보고 인간, 여성 그리고 우리자신을 이해해보는 책모임입니다. 부분 참여나 특정책만 참여도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해주세요.
https://forms.gle/amZTHYAQgozmWz2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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