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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과 기독교가 만드는 '창조적 관계맺기' 본문

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과 기독교가 만드는 '창조적 관계맺기'

고래의노래 2019. 10. 16. 23:47

 '페미니즘 더하기' 모임에서는 이제 2주간 종교에 페미니즘을 더해서 살펴봅니다. 특별히 종교 중 기독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요. 많은 종교 중 기독교를 선택한 이유는 매우 넓게 퍼져 있어서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데다가 페미니즘과 여러 이슈에서 가장 뜨겁게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평등이라는 가치에 매우 집중하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모습은 구분과 배제에 치우친듯 보입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일까요? 우리는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을 읽으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페미니즘의 다양성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

 

 저자는 먼저 페미니즘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다양한 페미니즘들이 수렴되는 지점에서 페미니즘을 정의내려봅니다. 초창기 페미니즘은 '여성의 권리'에 주목했습니다. 교육기회와 참정권의 확보가 주요한 목표였지요. 인권이 확장되는 근대화의 연장선에서 촉발된 이 페미니즘은 자유주의 페미니즘으로 분류합니다.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시간이 지날수록 중산 엘리트 백인 여성의 경험만을 보편화하는데요, 일부 여성들이 개인과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다른 계급의 여성은 배제되었지요. 여기에 반발하며 흑인 페미니스트인 '우머니스트'들이 등장합니다. 성별과 계급차로 인한 억압을 온 삶으로 버티면서도 자신보다 취약한 존재들을 돌보는 우머니스트들은 살고 살리는 상호 동반자 관계를 실천하며 페미니즘에 창조적 전략을 부여합니다.

 1930년대에 1세대 페미니즘이 주장하던 법적 성취들이 이뤄지자 페미니즘은 '여성의 정체성'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여러 갈래로 나뉘지요. 성구별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부터 성차를 통해서 본래적 여성성으로 세상을 구원하자는 주장, 본질적 성차는 없으며 매 순간 매 상황 속의 수행적 정체성만 존재한다는 주장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왔습니다. 후기 근대로 들어와서는 모든 존재는 탈경계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이 우열구분을 붕괴시킬거라는 '테크노 페미니즘'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페미니즘의 맥락을 죽 설명한 후 저자는 자신만의 언어로 페미니즘을 정의내려봅니다. '여성이 배제되고 박탈되었던 경험으로 배제와 박탈을 경험한 다른 이들과 연대하며 문명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사상과 실천'이 페미니즘이라고 말이지요.

 

 페미니즘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철저히 주체가 되라'는 페미니즘의 주문과 '주체를 저당잡힌' 엄마라는 역할 사이의 갈등 속에서 자주 혼란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 속에서 쭈뼛거리며 경계선에 머물고 있는 것만 같았지요. 그러나 역사 속의 페미니즘'들'은 우리가 주체이면서 공동체적일 수 있고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데는 여러 관점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관계맺기

 

 저자는 '참여적 정체성', '존재의 기공성', '스며듦'이라는 말들로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관계맺기를 시도합니다. 신의 형상대로 인간이 창조되었으므로 우리에게 의지가 있다고 할 때, 이 의지를 통해 주체로 서는 것은 신의 뜻을 따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주체는 고정된 것이 아니며 존재의 숨구멍들을 통해 서로 스며들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신을 포함하여) 다른 존재를 얼마나 내 안으로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내리는 선택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에 참여하는 '참여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페미니즘과 기독교가 함께 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훨씬 복잡합니다. 고정된 종교 경전이 있고 이를 해석하는 권한이 남성에게 부여되었던 긴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의지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존재의 숨구멍을 닫거나 숨구멍을 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고정된 존재'로 서로를 바라보고 억압하고 억압당했지요. 이 답답한 종교적 현실을 어떻게 페미니즘으로 풀어갈 것인지 페미니즘 신학은 페미니즘 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의 제안을 내놓습니다.

 

 페미니즘 신학은 성경이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언어로 쓰여진 것이라는 자각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메리 데일리는 교회 안의 남성언어 속에서 여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으므로 우리의 언어와 행동으로 하느님께 참여하자고 주장합니다. 기존의 기독교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지요. 반면 기독교 에코 페미니스트들은 성경과 전통 속에서 남자들이 왜곡시켜놓은 진리의 참모습을 찾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전통 안에 있지만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가이아적 요소(여성적 요소)를 찾아내자고 하면서 성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성경을 기본으로 하되 재해석 이상의 창조적 해석을 시도하는 여성신학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을 역사적 모형으로 바라보면서 영성과 사랑을 '상호 관계성'안에서 정의내립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랑은 관계, 관여하려는 힘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자본주의의 해체로 위계질서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 페미니즘'도 있습니다.

 

 이 날 모인 모임벗들은 모두 기독교와 '관계'를 맺고 계셨습니다. 기독교가 삶을 통과하는 정체성이기도 했고 기독교안의 종교적 형식과 내용에 큰 거부감이 없기도 했습니다. 나에게 맞는 교회를 찾는 과정 안에 있기도 했고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에서조차 거부감이 느껴져 힘들어하기도 했지요. 저는 가장 힘들어하는 쪽이었습니다. 제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남자였고 의식이 행해질 수 있도록 그림자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습니다. 성경은 여성에게 '유혹하는 사악함'이라는 죄를 덧입히고 순종만을 강요하는 듯 보였습니다. 구약의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은 여성을 성의 도구로 취급하면서 감정과 의지가 있는 존재로 보지 않았지요. 남자손님을 지키기 위해 여성을 폭도들에게 '던져주는' 판관기(사사기) 구절을 읽으면서는 저는 분노로 몸을 떨고 눈물지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종교의 위계질서 안에서 신과 나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지요.

 

 질문하고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 '특별하게 지어진 이유'인데도 '믿음의 공동체'에서는 한가지의 믿음만을 강요합니다. 믿음은 생각을 나누고 소통하면서 생겨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얼마나 내 존재를 열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과정은 물론 평화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깎이고 부딪히는 것보다는 스며들고 드러내는 과정 속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마치 신이 인간을 흙먼지를 '쌓아' 빚으시고 생명의 '숨'을 넣으신 것처럼 말이죠.

 

번지고 스며들고 기다리기

 

 우리나라는 페미니즘의 여러 물결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습니다. 서구에서는 200년 넘게 서서히 진행된 페미니즘의 흐름이 몇십년 안에, 특히나 최근 몇 년 안에 폭발적으로 몰아치고 있지요. 현재 서구 페미니즘의 흐름은 '모든 것이 가능한 개인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축약적으로 진행되는 우리나라의 특징상, 저자는 페미니즘을 향한 전투적 여성상이 당분간 존재해도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모두를 포용할 여력이 없고 '나'로 사는 과제만으로도 벅찰 때는 '나되기'에 몰두하라고도 말하지요.

 

 위 그림은 습식수채화입니다. 두꺼운 종이에 물을 흠뻑 묻혀 적신 후에 수채 물감을 일부러 번지게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지요. 우리가 태어날 때 하나의 색깔들을 부여받았다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물먹은 종이 위에 뿌려진 것과 같을 것입니다. 색깔이 번지고 뻗어나가는데 붓질이라는 의지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많은 부분 우연적인 흐름 안에서 색들이 서로 만나고 섞입니다. 습식수채화가 어려운 건 이러한 우연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런 우연과 의지가 항상 아름다운 화면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나를 억압시키는 상대에게도 내 존재를 열어 스며들게 하는 상호관계적 사랑을 실천한다는 건 우리에게 아직 너무 버겁게 느껴집니다. 그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그래야 마땅하게 생각되기도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우린 작은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런 마음은 쉽게 죄책감으로 이어지곤 하지요. 그런데 내가 존재의 숨구멍을 열고 닫는 것은 오롯이 나의 선택이며 그것은 상대에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자 조금 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서로가 동시에 문을 여는 축복이 일어난다면 분명 놀라운 연결감으로 서로에게 희열을 알겨주겠지요. 하지만 존재의 의지를 넘어 중요한 것은 '타이밍'입니다. 저자는 지금 종교로 밀려들어오는 페미니즘의 물결은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대중적 동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시대의 변화'가 가지는 힘을 지적했습니다. 내 의지와 선택만으로 가능하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존재를 열 수 있는 의지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내 상태 또한 존중하는 것이지요. 내 의지와 선택의 힘을 믿으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어쩌지 못하는 바깥의 흐름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을 모아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 아닐까요. 모두가 사랑으로 연결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했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참여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희망으로 떠오릅니다. 물먹은 종이라는 세상에 참여함으로써 아름다운 그림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지요.

 

페미니즘과 기독교가 그리는 창조적 미래

 

 저자는 후기 근대 사회는 탈성적 전문가 개인의 시대가 될 것이며 자본 경쟁력이 없는 사람들이 배제되기 쉬운 구조가 생길 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자본 이외의 가치로 기여하는 개인들도 존중받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전통적 가족, 사회구조 안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이에 대한 창조적 관계맺기 방안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결합으로 가능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을 불러내고 서로 만난 적 없는 문화지평들의 수렴 가능성을 제기함"(주디스 버틀러_'젠더 트러블')으로서 가능한 미래를 그려봅니다.

 

 종교는 삶의 근간에 대한 믿음이고 그래서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야기하기 힘든 주제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엄청난 혼란이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한 고민과 생각을 나워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언제나처럼 책으로부터가 아니라, 함께 이야기하는 중에 저를 다시 세우는 깨달음들이 선물처럼 찾아왔습니다. 이 선물을 잘 품은 채 삶에 녹여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을 끝까지 읽고 만납니다. 책의 후반부에는 이론을 넘어 현실에서 페미니즘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우리가 그린 미래에 우린 어느 만큼 참여할 수 있을지 페미니스트 기독교인의 가능성과 만나보아요.

 

* [페미니즘 더하기] 10주간 3권의 책을 읽으며 의학, 종교, 심리분야를 페미니즘의 필터로 살펴보고 인간, 여성 그리고 우리자신을 이해해보는 책모임입니다. 부분 참여나 특정책만 참여도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해주세요.
https://forms.gle/amZTHYAQgozmWz2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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