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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페미니즘 더하기

[페미니즘 더하기] 진화가 이야기하는 행복한 균형점

고래의노래 2019. 10. 8. 15:54

 '페미니즘 더하기' 네번째 모임에서는 <여성의 진화>를 마무리하며 진화의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여성의 삶을 정리하고 그것을 내 삶과 미래에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여성의 진화>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월경과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을 거친 여성은 폐경에 접어듭니다. 폐경은 인간만의 독특한 현상입니다. 일단 월경현상 자체가 인간의 주요 특징이기도 하거니와 배란중단으로 폐경을 정의내린다해도 대부분의 포유류들은 번식연령과 생애연령이 비슷하기 때문에 폐경을 삶의 과정 안에서 경험하지 않지요. 폐경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이 번식을 목적으로 진화해왔다고 한다면 폐경 이후의 삶은 어떤 목적이 있는 걸까요?

 

폐경은 '정상'인가?

 

 우리가 폐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대게 부정적입니다. 그것은 생식력의 중단이라는 '상실'의 의미에 더해 안면홍조, 발열감, 질 위축, 우울증, 골다골증 등 '정상'범주를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증상들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폐경 증상들은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고 합니다. 심지어 저자는 '세계 대부분의 여성은 폐경을 힘들어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하네요. 폐경을 에스트로겐 결핍 장애로 판단하고 이 시기 여성의 신체정서적 변화에 병리적으로 접근하려는 사회의 태도가 폐경을 힘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호르몬에 의해 영향받는 것은 안면홍조와 질 위축 뿐이며 그 이외의 증상들은 여성이 경험하는 정신적,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네요. 실제로 우리가 보아온 노년 여성들을 떠올려보니, 폐경 증상이 대부분 있기는 했지만 정서적 측면에서는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 인간관계가 다양하고 자신의 관심과 흥미에 에너지를 쏟는 노년의 경우 정서적으로 거의 문제가 없는 듯 했습니다.

 

 저자는 폐경 증상의 개별적 치료와 폐경 자체에 대한 치료는 다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춘기가 병리적 증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폐경 또한 삶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정상' 건강상태라는 건 어떤 기준일까요? '잠'을 예로 생각해본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수면상태만이 정상인걸까요? 노인들이 푹 잠들지 못하고 자주깨는 것은 노년기에 발생하는 호흡장애에 대한 적응적인 반응일 수 있습니다. 자주 깨야 호흡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너무 깜깜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오히려 안정을 확인할 수 없어 불안해기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고 합니다. '정상수면'에 대한 과도한 기준은 오히려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할머니를 '살린' 진화의 선택

 

 번식을 목적으로 한 진화과정에서 번식능력이 사라진 여성의 삶은 '설명이 필요한 현상'입니다. 수렵채집사회와 영장류 집단을 관찰해보면 대부분 가임기가 생애주기와 맞물리나, 가임기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 이후에도 꽤 오래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살아갈 경우 자손의 번식율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는 것으로 관찰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할머니 가설'이 생겨났습니다. 번식을 중단하고 오래 건강하게 사는 할머니가 손주에게 높은 수준의 양육을 제공하면서 번식성공율을 높였고, 그리하여 딸이 번식을 중단할 때까지 건강을 유지하도록 자연선택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가설은 '노화의 역설'로 다시 힘을 받습니다. 나이가 들면 신체와 인지 기능이 떨어지지만 전체적으로 삶에는 더 만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진화의학에서는 이것이 자신에게 더 만족하면 자손에게 보다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이것이 번식성공율 증진으로 나아가기에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남은 삶과 전망이 줄어드는 걸 받아들인 노인은 삶의 동기가 개인적 성취에서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성취로 바뀐다는 것이지요.

 

 이 설명은 우리에게 씁쓸함을 남겼습니다. 한국의 노인 우울증은 다른 나라에 비해 예외적으로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노인 고용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데다 임금이 굉장히 낮습니다. 더 이상 일하지 못할 경우 위험한 상황까지 처할 수 있지요.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과 케어가 아니라 능력에 대한 보상이 사회적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돌봄은 가족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독거노인은 돌봄의 사각지대에 처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더해 우리사회에서는 나이에 따라 삶의 가능성이 억압됩니다. '이 나이대에는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정상 기준'이 매우 세밀하고 강력합니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저자는 '고도로 조직화된 조용한 폭력'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 비정상으로 분류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심리적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입니다.

 

 이전의 모든 진화의학적 설명이 그러했듯이 할머니 가설도 현 사회문제들과 맞물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합니다. 과거에 공동체 무리 안에서 공동양육을 했던 시절과 다르게 사회적으로 고립된 조부모 위탁양육은 최근의 보편적 현상입니다. 이러한 양육환경에서 손주양육은 할머니에게 건강상 나쁜 영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진화적으로 선택된 최적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일 것입니다. 손주를 돌봐야하는 동기가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상황이라면 할머니에게 양육참여는 건강상의 이득을 줍니다. 자신의 건강에 스스로 신경을 더 쓰게 되기 때문이지요. 노인의 삶이 나아질수록 어린 아이들의 삶도 나아지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찾아야하는 것은 '적당한 수준의 할머니 역할'입니다.

 

과거가 이야기하는 미래의 환상이란

 

출처 : http://jamesturrell.com


 위 사진은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간츠펠트'(ganzfeld)라는 작품입니다. 처음에 관람객들은 공간 바깥에서 공간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됩니다. 너머의 공간을 '공간'으로 규정하는 어떠한 시각적 정보도 없기 때문에 대부분 그 공간을 평면으로 인지하지요. 그러다가 안으로 발을 디디면서 화면으로 보였던 것이 3차원 공간이라는 것에 놀라고 어떠한 경계도 없어서 무한으로 뻗어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에서 두번째로 낯선 체험을 합니다.
 'ganzfeld'는 전체시야라는 뜻이 독일어입니다. 모든 감각정보를 차단했을 경우 환상과 환시 등을 경험하는 심리현상 용어라고 하네요. 너무나 깜깜하고 조용한 환경이 잠을 방해한다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감각적으로 내가 있는 곳이 어떠한 곳인지 인지할 수 없을 경우 인간은 환상을 만들어내서라도 이를 보상하려 합니다. 터렐은 이렇게 감각이 차단된 환경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다른 차원의 경험을 하도록 인도합니다.

 

 저자는 진화의 이야기들이 과거를 알려줄 뿐 미래를 재단하지는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진화적 결과의 무력한 희생자가 아니며 인간에게는 세대로 전해지는 문화와, 개인의 자율성, 그리고 마음이라는 의지가 있으므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우리를 다독입니다. 그러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몇가지 선택들을 제안하지요. 미래를 위한 긍정적인 행동자본을 습득할 수 있게 건강한 삶의 방향에 대해 청소년들을 교육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새로운 행동의 습득은 청소년기에 가장 잘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임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나 여자아이를 임신한 경우 대를 이은 위험을 줄일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신경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진화의 목표가 번식이라는 건 여성의 삶의 목표가 번식이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할머니가 손주를 돌보며 건강해지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 할머니가 손주를 마땅히 돌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요. 우리가 진화된 방식을 이해하면 진화의 시스템이 더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할 수 있도록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감각으로는 헤어릴 수 없는 미래의 입구에 서 있습니다. 인류의 모든 시간들이 그러했지만 지금은 특히나 과거의 몸이 현대의 시간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때입니다.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미래로의 길을 더듬어 찾으려면 과거의 감각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차원의 감각을 열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감각의 보상으로 우리에게 드러난 '환상'을 환상이 아닌 것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요.

 

"복잡한 정치적 혹은 이데올로기적 현실 속에서 여성의 건강 증진을 가로막는 가장 심각한 어려움은

바로 여성이 자신의 삶을 얼마나 스스로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가에 있습니다."

 

 상상해봅니다.
 아기가 태어난 이후 엄마와 항상 함께 하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모유수유가 엄마와 아기 모두의 건강에 이득이라는 것을 사회가 다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몇년간의 육아휴직이 당연하게 인정되고 육아의 경험은 엄청난 경험으로 존중됩니다. 고립된 육아가 얼마나 양육자를 힘들게 하는지 알기에 온 사회는 아기와 양육자를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아기와 함께 못갈 곳이 없지요. 육아 대신 일을 선택한 엄마에게는 원한다면 언제든 아기를 보고 수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됩니다. 아기는 직장 바로 근처에서 보육되며 수유시간도 인정됩니다. 폐경은 인생의 2챕터로 생각되며 완경이라고 불립니다. 조부모양육자에게는 아기와 함께 할 수 있는 건강 서비스가 특별히 더 제공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생애주기에 대해 청소년들에게 교육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에서 거부하거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이를 사회가 전폭적으로 지지합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지극히 환대되고 존중받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에 기쁜 일이며 그렇게 돌봄받은 만큼 나도 누군가를 돌보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이러한 상상이 지금의 현실에 대한 보상적 환상이라면 환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과제일 것입니다.

 

찬란하고 아름다운 매일매일의 운명

 

 <여성의 진화>를 읽으면서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알고 있던 정상 범주가 얼마나 편협한 기준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아기와 노인이 자주 깨는 것은 건강하기 위한 정상 행동입니다. 폐경은 자연스러운 삶의 경험이며 호르몬 비정상 상태가 아니지요. 육식은 인류의 뇌팽창에 기여했으며 이에 따라 육류적응성 유전자 또한 진화했습니다. 저칼로리 고섬유질 채식중심식사가 건강식인 건 난소호르몬 수치가 높은 건강부국 여성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내가 쫓고 있던 기준이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인지 우리는 비판적으로 사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진화적 입장에 따르면 결코 완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건강, 발달, 번식에 대한 각자의 경험은 시간, 에너지, 자원의 트레이드오프 결과입니다. 우리의 몸은 내가 의도한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최적의 접점을 찾아서 반응합니다. 진화적으로는 십대의 갑작스런 임신이나 어떤 형태의 불임이 그 접점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결과로 인한 누군가의 고통이 마땅하거나 자연스럽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눈 앞의 고통스런 현실을 마주하면 진화의학적 정보는 전혀 도움도 위로도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함께 돌보며 살아가도록 진화했지만 현대 사회 환경은 진화적 최적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몸과 마음의 증상들로 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에너지를 최적화하기 위한 매일매일의 곡예는 인간 뿐 아니라 생명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운명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의 순간들에 우리는 그렇게 최선을 다해 살고 있습니다.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모든 존재들은 그 자체로 정상입니다.


 진화에 대해 알고 싶었던 이유는 여성의 존재 근원에 닿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성적 가치로 강요되는 돌봄과 모성애 등이 어디까지 당연하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사회적 맥락을 뺀 여성의 몸과 본성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여성의 진화>를 마무리하며 제가 알게 된 것은 생명들이 벌이는 매순간의 애씀이 참으로 찬란하다는 것입니다. 진화는 우리의 몸을 규정했지만 가능성도 열어놓았습니다. 자연선택이 우리에게 부여한 적응성과 유연함을 토대로 과거의 몸와 현대의 삶 사이에서 우리는 각자 '행복한 균형점'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그 균형점을 향한 애씀에 우리가 있고, 페미니즘이 있고, 그래서 뿌연 미래 위에 떠오른 환상이 환상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진화의학과 페미니즘은 그렇게 만나고 있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종교에 페미니즘을 더해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을 함께 읽고 이야기해봅니다. 진화의학에 대해 읽어가면서 자주 종교적인 생각이 연결되어 떠오르곤 했습니다. 아마도 존재에 대한 고민들은 한 군데서 만나기 때문이겠지요. 초월적 영역을 페미니즘적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질지 같이 읽고 이야기해보아요.

 

* [페미니즘 더하기] 10주간 3권의 책을 읽으며 의학, 종교, 심리분야를 페미니즘의 필터로 살펴보고 인간, 여성 그리고 우리자신을 이해해보는 책모임입니다. 부분 참여나 특정책만 참여도 가능합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해주세요.
https://forms.gle/amZTHYAQgozmWz2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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