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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간, 베드로서간, 요한서간, 유다서간] 2천년 전 편지가 나에게 오다.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야고보서간, 베드로서간, 요한서간, 유다서간] 2천년 전 편지가 나에게 오다.

고래의노래 2024. 10. 8. 13:49

*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 비신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여성 4명이 모여 성경을 온라인으로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느낌과 생각, 깨달음과 질문들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고 톡과 밴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서간들 뒤에 다른 사도들의 짧은 서간들이 이어진다. 먼 지역의 그리스도 공동체에 차별없는 사랑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호소하는 글들이다. 사람이 계급과 귀천으로 분류되고, 고통과 가난, 질병이 신의 징벌로 여겨지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지금과는 또 다른 차원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편지에는 세상의 믿음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다르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써져있다. 이 관점의 전환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4) 

실로 이러한 믿음 자체가 사회전복적인 태도이며, 그리스도교는 사회혁명적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도들은 바로 그 점을 걱정한 듯 얼핏 모순되보이는 이야기를 한다.

"주님을 생각하여 모든 인간 제도에 복종하십시오...여러분이 선을 행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무지한 입을 막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자유인으로 행동하십시오 그러나 자유를 악행의 구실로 삼지 말고, 하느님의 종으로서 행동하십시오...불의하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느님을 생각하는 양심 때문에 그 괴로움을 참아 내면 그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1베드 2:13-19) 

자유인으로 행동하되 현실에 복종하라. 고난을 하느님을 생각하며 참아내라. 
선을 자유 안에서 행하되 내가 무엇을 받을지는 자유 안에서 기꺼이 감내하라.
할 말은 하고, 행실은 내 책임이되 악법도 아직은 법이라는 것?
내 삶에 받아들이기 위해선 해석이 필요한 말들이다. 곰곰히 머물러 봐야겠다. 

그런 하루하루의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곧 재림하실 것'이라는 희망으로만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겐 그 시간이 너무 더디기만 하다. 사도들은 사탕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그 시기가 곧 올 것임을 그리고 예상치못한 날에 올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우리는 끝까지 견디어 낸 이들을 행복하다고 합니다." (야고 5:8-11)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2베드 3:9) 

인내는 어느만큼 적극적인 행동인걸까? 옛이야기의 그 숱한 기다림들이 '그저 기다리기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읽을 때마다 다시 느끼긴했지만, 차별없는 사랑의 가치와 점점 더 멀어지는 사회를 보면 답답함이 몰려온다. 과연 참는 것은 미덕일까?

이제까지의 서간들이 가르침과 설득을 위한 지시적인 느낌이 강했다면 요한의 서간은 다른 사도들의 서간과 확연히 다른 문체를 보여준다. 그의 편지는 한마디로 '사랑의 편지'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요한1 4:7)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요한1 4:16)
"내가 그대에게 써 보내는 것은 무슨 새 계명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지녀 온 계명입니다. 곧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가 그 분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그 계명은 그대들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2 5-6절)

'사랑'이라는 단어가 요한서간에 몇 번이나 나오는걸까 세보고싶어질 정도로 요한은 사랑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며 '다만 사랑하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글의 내용 뿐 아니라 편지를 쓰는 요한의 태도에서도 두드러지는데, 두번째, 세번째 편지에서 요한은 "나는 그대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요한2, 요한3 1절)라며 인사를 시작한다. 또한 편지를 마무리할 때는 아래처럼 마무리한다.

"내가 그대들에게 쓸 말은 많지만 종이와 먹으로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아..편지가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사랑은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정말 나누고픈 것은 좋은 말들이 아니라 '우리 자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고백. 요한복음이 상징과 은유의 언어로 다른 복음들과 다른 신비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졌던 것처럼 요한서간의 에너지도 남다르다. 요한 사도의 글들은 내용을 넘어서 '쓴 사람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하늘의 정신이 그 존재를 통과해 손끝으로 나왔다는 게 느껴지는 글들. 마치 2천년의 시간을 건너 편지을 받은 듯 생생한 느낌이다.
게다가 둘째 서간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쓰는 편지이다. 여성에게 이렇게 별도의 편지를 쓴 사도라니...다른 사도들처럼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쓰는 글마다 사랑의 에너지를 비추는 요한사도가 정말 궁금해진다. 

그리고 요한은 내가 다른 사도들의 편지글 속 '인내'라는 단어 속에서 막혀있던 부분에도 한줌의 빛을 뿌려주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 분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 (요한1 5:14)

아, 기도가 있었지. 누군가는 기도가 투쟁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으나 간절한 기도의 힘을 나는 믿는다. 지향을 살아가고, 지향을 기도하는 것. 예수님께서 은둔자가 아니셨고 사랑을 향한 삶과 기도 속에서 끝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셨듯이, 기도가 우리를 세상으로 이끌어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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