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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복음] 나를 존중하고, 나를 넘어, 나를 따른다 : 곰곰히 생각하고, 묻고, 순명하기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루카복음] 나를 존중하고, 나를 넘어, 나를 따른다 : 곰곰히 생각하고, 묻고, 순명하기

고래의노래 2023. 9. 4. 15:53

*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는 가톨릭, 개신교, 불교, 비신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여성 4명이 모여 성경을 온라인으로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느낌과 생각, 깨달음과 질문들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고 톡과 밴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잘 정리된 교과서같다면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생에 대한 전기와 같다. 우리나라 신화로 치자면 신비로운 탄생과정에서부터 비범했던 유년기,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시선 등을 전면에 배치하여 뒤에 나올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믿음을 배가시킨다. 아마 루카는 '이야기'의 힘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루카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들 중 인상깊은 부분
-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 예수님 탄생 예고
-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 마리아의 노래
- 요한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
-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 예수님의 유년, 소년시절
-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 마르타와 마리아
- 되찾은 아들의 비유(돌아온 탕아)
- 예수님과 자캐오

예수님 탄생 예고는 루카복음에만 나온다. 그 유명한 성모님의 ‘선언’이 오직 루카에만 나오는 이야기였다! 이 장면에서 성모님의 태도는 그야말로 놀랍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고 천사가 말하자 마리아는 이 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히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자 ‘남자를 모르는데 어찌 그게 가능한지?’ ‘묻는다.’ 하느님께서는 불가능이란 없고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도 그렇지 않냐고 하자 ‘순명하신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받아들임의 순명 Fiat. 성모님의 순종은 하와의 불순종과 자주 비교되지만, 가장 비교할만한 부분은 순명 이전의 행동, 즉 '곰곰히 생각하고', '의문을 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을 마리아는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데 이런 태도는 다른 장면에서도 나온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복하러 방문한 건 동방박사뿐이 아니었다. 목자들은 천사의 알림으로 예수님을 경배하러 간다. 그리고 성모님께 천사에게 들은 이야기 (이 아이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해준다. 성모님은 이 이야기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히 되새겼다.' 

수태고지 장면은 너무나 유명해서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관점은 참 다양한 것 같다. 나에게는 '지금 이해할 수 없다해도 시간을 두고 살피는 태도'와 그렇다고 '스스로의 의문을 무시하지 않는 것', '적극적인 선택으로서의 순종'이 깊게 다가왔다. 지금의 나, 지금의 세상, 지금의 잣대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 지금 아니어도 언젠가라는 자세로 판단을 유보하며 열린 마음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용기있는 모습인가. 나의 한계를 질문에 담아 소통하는 건 나와 다른 이에 대한 얼마나 큰 믿음인가. 내 욕구가 아니라 내 역할을 기쁘게 받아들인다는 건 또 얼마나 위대한 포용인가.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같은 복음서 안에 있는 것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하다. 예수님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바쁜 마르타와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데에만 집중하는 마리아가 대비되고, 마르타는 예수님께 마리아의 이런 '게으름'을 타일러주십사 청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일상의 돌봄 역할을 주로 맡고 있는 여성들은 마르타의 이 마음에 절절히 공감한다. 왜 나만 이런 일을 하나요? 하는 억울함. 

하지만 예수님 말씀은 매정하게 들린다.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저 말씀의 진정한 뜻은 무얼까. 여러가지 해석들이 존재한다. 예수님 발치 아래서 말씀을 듣는 것은 그 당시 제자들의 모습이었기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나타낸다는 해석, 흔치 않은 여성 제자로서의 마리아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예수님의 대답(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대답)을 유도하며 마르타가 이 질문을 했다는 해석, 마리아는 정신적인 부분에서 집중하는 초기 제자, 마르타는 손발로 행동까지 이어진 성숙한 제자의 예라는 해석, 여성의 내면 중 두가지 여성성을 각각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 등등...

여성성의 원형으로 여성 정체성을 살피고 있는 나에게 마리아와 마르타는 여성 안의 두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여겨졌다. 돌봄의 역할도 소중하고 거룩하다. 그것을 성모님처럼 내 역할로 존중하려면 어찌 해야할까. 예수님께 이런 말씀을 다시 듣고 싶다. 
"마르타야, 너의 일이 참 복되다. 지금은 마리아에게 이 기회를 양보하지만 너에게도 이 시간이 올 것이다. 여성들이 내 이야기를 많이 듣길 바란다."
'아직은' 내 한계 안에서 이해하기가 힘들다. 곰곰히 되내이며 나에게 시간을 허락하고 떠오르는 질문을 여러 벗들과 하느님께 여쭈면 어느 샌가 말씀이 내 안에 스며들어 있겠지. 

 

피정 때 수태고지 장면을 묵상하는데 성모님과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이 자꾸 이제까지 본 성화 속 모습으로만 떠올려졌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초월한 듯한 표정의 마리아와 날개달린 가브리엘로. 나만의 장면을 길어올리고 싶어서 긴 시간 이 장면을 상상했고 마침내 매의 형상으로 온 가브리엘과 당찬 눈빛의 어린 성모님 모습이 손 끝에서 나왔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의 한 마디가 마음에 박혔다. 
"두려워하지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아, 내가 하느님께 원하는 게 이거였구나 싶었다. 마태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 이야기에 속쓰려하고, 베데딕도 수도규칙서의 '하느님께서는 차별이 아니라 구별하신다.'는 부분에서 머리가 띵해지면서 내가 하느님과 어떠한 관계맺음을 원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는데, 그건 '특별히 예쁨받는 거'였다. 총애는 '남달리 귀여워하고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나의 한계를 넘어 생각'하면서도 '지금의 나를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역할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께 구별되어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난...감당할 준비가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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