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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모성애와 완경기] 순간의 진심들로 삶을 마주하며 본문

내 안의 여신찾기/여신모임 6기 2021 가을

[모성애와 완경기] 순간의 진심들로 삶을 마주하며

고래의노래 2021. 11. 8. 19:34

 

* [내 안의 여신찾기] 모임은 3개월동안 두 권의 책을 읽고 생애주기별로 삶을 돌아보면서 내면의 힘을 발견해가는 여성들의 내면 여행 모임입니다.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됩니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조건없이' 보살핀다는 것은 언제나 고귀하게 칭송받는다. 그 행위가 너무나도 '인간답지않기'때문일까? 아니면 오히려 '너무나 인간다워서'일까? 아니면 그저 그러한 무조건적 환대가 모두에게 결핍되어있기 때문일까? 모성애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사회의 이러한 욕망은 정작 이를 자연스럽게 느껴야 할 엄마들을 옥죈다. 바깥의 틀을 깨고 내면의 지혜에 연결된다면 엄마들은 모성애를 어떻게 느끼게 될까?

 

엄마 노릇을 하며 비틀거리다.

 

 첫 아이를 낳고 아기를 안아들었을 때 '이제 난 영원히 엄마'라는 책임감이 무섭게 엄습했었다. 그 때는 그 책임감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몰라 계속 허둥지둥했다. 그 무게를 편안히 내 본성과 연결하지 못하고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처럼 마치 회사에서 진짜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은 양 떠안아 버렸다. 온갖 육아서를 읽으며 아기를 키우는 방법을 꾸역꾸역 엄마역할 안에 집어넣었다. 하지만 세상이 제시하는 엄마역할은 너무나도 다양했고, 마땅히 가져야한다는 모성적 태도도 넘쳐났다. 머리로 익힌 엄마 역할은 자주 삐걱거렸고 내가 미처 채우지 못했던 유아기적 욕구를 아이를 통해 해결하려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에게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하고 때로는 질투도 났지만 그 모든 감정을 사회적 언어로서의 모성애는 담아내지 못했다. 엄마 역할이라는 가면을 쓰고있는지도 모른채 허우적거리면서 엄마가 되고 난 후 내가 사라졌다며 한탄했고 또렷한 답이 없이 넘사벽 기준만이 제시되는 엄마 노릇에 절망하곤 했다. 하지만 그 때 내가 느꼈던 갈증은 바깥의 기준과 평가가 아니면 나 스스로를 느끼기 어려운 중독상태로부터 왔던 것임을 이제 알겠다. 

 

 나와 아이가 서로 어떻게 건강하게 관계맺을 수 있는지는 오직 우리만이 해결할 수 있는 과제였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사회적 틀은 여성들을 자기자신으로 느끼기 힘들게 한다. 엄마와 아이 관계에서 경험하는다양한 역동성을 순간순간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어야 오히려 내 안의 모성을 자유롭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받고 싶었던 사랑과 돌봄을 언젠가 누군가가 줄꺼라는 꿈을 버리고 내가 스스로를 돌보고 사랑해줘야 한다는 걸 쓰리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우리 각자의 모성을 찾아서.

 

 모임 안에서 우리는 저자가 제시하는 땅의 어머니와 무지개 어머니의 구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모임벗들께서 이 둘의 명확한 구분은 불가능하며 우리 모두 둘 경계의 어디쯤에 서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7번째 이책을 읽지만 여전히 이 구분은 엄마에 대한 또 다른 기준이 제시되는 듯 해서 불편하다. 보살핌에 대한 강요로 인해 한 쪽으로 밀려난, 어머니의 또 다른 부분을 되살리려는 의도일 뿐이라는 걸 짐작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엄마의입장에서가 아니라 자녀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이 구분은 전혀 의미없을 것 같다. 아이들은 엄마를 기능적으로 바라보기보다 '존재'로 마주하고 겪기 때문이다. 엄마가 집안일을 하든 자신의 업무를 하든 아이는 자신의 역할을대하는 한 인간의 태도를 배울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 삶의 목격자들이며 그 삶으로부터 배운다. 돌봄이 영감이 되고, 영감 자체가 아이를 돌보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의 나이에 따라서 달라지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극적인 돌봄이 필요한 시기와 한발짝 떨어져있어야하는 시기가 있으며 그래서 모성애도 다양한 모습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다. 우리가 엄마를 보며 경험하기도 했고, 지금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엄마로서 겪고 있기도 하듯, 엄마와 자녀와의 관계는 고정되어 있지가 않았다. 모성애는 엄마와 아이의 기질과 나이 등에 따라서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그 모든 엄마됨의 뿌리로서 모성애를 한마디로 정의해본다면, '자녀와의 운명적인 연결감'이 아닐까 싶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운명적 관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통해왔지만 내 것이 아닌 한 존재와 붉은 실로 묶여버리는 것이다. 그 후로 자녀의 안녕을 바라고 염려하는 마음이 다양한 방식과 표현으로 영원히 이어진다. 

 

때론 은유가 가장 정확한 정의가 된다.

<엄마가 된다는 건 뭘까?>라는 그림책에서 아기토끼들은 '엄마놀이'를 하다가 '엄마가 된다는 것'에 대해 정의를내려간다. 

"엄마가 된다는 건...

아이의 이름을 부르고,

아이와 손을 잡고 걷고, 

걱정하고 걱정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꼭 껴안고 눈물을 흘리는 거야."

모성애는 즐겁고 환희에 차기보다는 애처롭고 편치 않은 마음 상태라는 생각이 든다. 깊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은 스스로 취약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성애를 내면의 지혜로부터 배운다는 것은 엄마로서 밝고 긍정적인 감정만을 느끼게 된다는 게 아닐 것이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우리만의 건강한 조율점을 찾아내고 그 지점에 두려움없이 몰입하는 것, 그것이 내면의 지혜에 연결된 '각자의 모성'이리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진심으로. 

 

 엄마라는 '역할'에 매몰되지 않은 채 모성을 자유롭게 느끼고 싶다. 아이가 주는 무조건적 사랑으로부터 배우고인간이 성장한다는 경이로움을 아이들 곁에서 온전히 통과하고 싶다. 이전에는 아이들 돌봄에서 벗어나게 되는 완경기에 '원래의 내'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월경이라는 주기적 리듬을 졸업하고 나만의 리듬을 찾아가게 되는 시기, 몸과 마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요동치던 시절을 지나 자연 어머니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바로 서게 되는 시기, 진정한 삶의 개척기로 완경기를 상상했다. 

 

 물론 여전히 삶의 변곡점일 그 시기에 새로운 많은 것들이 다가오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저자는 여성이 완경기를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것은 문화적 환경, 가족력, 개인적 기대감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명백히 완경기 이후의 삶, 나이로 치자면 노년은 여러 면에서 어린 아이처럼 취약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몸도 약해지고 경제력도 떨어질 것이다. 나의 엄마됨이 내 기대와 달랐듯 내 노년기도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기대하되 실망하지 않고 변화 속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환대할 수 있으려면, 결국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나'로 살아가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꿈꿔왔던 모습이나 기대했던 장면이 아니어도 진심으로 삶을 마주하면, 그런 시간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가 빚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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