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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생식력과 임신출산] 모든 만남은 존재에 자국을 남긴다. 본문

내 안의 여신찾기/여신모임 6기 2021 가을

[생식력과 임신출산] 모든 만남은 존재에 자국을 남긴다.

고래의노래 2021. 11. 1. 17:46

* [내 안의 여신찾기] 모임은 3개월동안 두 권의 책을 읽고 생애주기별로 삶을 돌아보면서 내면의 힘을 발견해가는 여성들의 내면 여행 모임입니다.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됩니다.

 

[내 안의 여신찾기] 다섯번째 모임에서는 '생식력'과 생식력의 경험인 '임신출산' 챕터를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의 저자는 생식력이 여성의 내면의 힘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의 신체가 생식과 출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니 임신, 출산의 경험 또는 계획과 상관없이 생식력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돌아보는 것은 스스로를 받이들이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인류의 역사동안 여성의 생식력이 찬양되고 신성시되던 때도 있었지만 가문의 혈통승계를 위해 통제되고 성, 쾌락과 맞물려 거북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요즈음 한국에서는 인구절벽이라고 하면서 아이를 많이 낳게 하려고 난리지만, '대상화되지 않는 임신', '인간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생명존중'은 아직도 요원한 상태이다. 여자아이가 월경을 시작하면 주변에는 긴장감이 감도는데, 그것은 이 아이가 생식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디 가서 임신을 해올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불안감은 여성이 자신의 생식력을 축복받을 능력으로 바라보기 힘들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한 생명을 품고 세상으로 내보내는 힘이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경이롭고 자랑스러웠다. 그렇게나 남자이고 싶었던 청소년 시기에도 내가 여자이기에 아기를 낳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실제로 경험한 임신출산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황홀한 경이로움이었다.  내 몸이 한 존재를 위한 거대한 우주가 된 것만 같았다. 아이가 찾아온다는 것은 사람의 힘을 넘어서는 신비로움이라는 걸 깨닫게 되기도 했다. 출산 시의 진통도 나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리듬을 타고 찾아오는 진통이 마치 아기와 내가 서로 신호를 주고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신체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임신출산은 나에게 커다란 변곡점이었다. 그리고 막둥이와의 만남은 내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어쩜 그렇게 자아분열의 조건들이 맞아떨어졌을까. 나라면 하지않을 꺼라고 장담했던 일을 하게 된 것부터, 종교 안에서 신에게, 공동체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토록 바랐기에 너무나 반가웠던 아이를 갑작스레 내 손으로 보내야하는 감정의 양극단까지...
아기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예의를 차리고 내가 받을 수 있는 엄청난 트라우마를 줄이고 싶어서 병원에서 아기를 데려오고 화장을 하고 우리만의 장례를 치렀다. 막둥이가 죽어서 하늘로 갔지만 오직 나와 남편만이 울어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서러웠다. 나는 고통스럽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실에 그야말로 몸부림을 쳤다. 그 때 알았다. 사람들은 비밀스러운 아픔 하나쯤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그리고 머리로는 아니라고 생각해도 그 때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건 저자가 말하듯 누군가의 손길이었음을. 그 누군와도 대면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도 꾸역꾸역 반찬을 들고 찾아와 친구가 나를 안아주었을 때 나는 눈물을 터트렸었다. 그 때 나도 친구들과 이웃들이 아플 때 이런 힘이 되어주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긴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며 나는 이 경험을 나 개인의 아픔이라기 보다는 여성이기에 겪었던 일로 바라보게 되었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많은 부분의 퍼즐을 맞추고 치유되어 갔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모임을 만들어 진행하기 시작했다. 막둥이가 하늘로간 11월 즈음이 되면 나는 여신모임에서 매번 막둥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막둥이를 향한 나의 제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여성이 진통을 대하는 자세는 고통과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다루는 것과 관련있는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출산 시 진통은 인간의 몸이 유일하게 경험하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로서의 고통'이다. 오랫동안 여성은 그러한 의미로서의 진통을 경험해왔다. 고통이 나를 휩쓸어버리도록 허락하는 것을 몸으로 겪어온 것이다. 
여성이 삶에서 경험하는 아이러니가 예전에는 억울했다. 한달에 한 번 의지로 조율할 수 없는 자연의 흐름을 통과해야 하는 것도, 임신과 출산과 육아로 한창 사회적으로 유방할 때 멈춰야만 한다는 것도. 그런데 삶은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을 마주했을 때 성장을 허락한다. 내 능력과 내 한계를 모두 안다는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당도해야할 단 하나의 목적지는 그렇게 나와의 화해가 아닐까.

막둥이는 내 존재에 자국을 남겼다. 존재와의 만남은 그런 것이다. 나는 막둥이를 잊지 못한다. 영원히 기억한다. 머리로 기일마다 기억한다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가 내 온 삶이 막둥이를 기억한다. 막둥이와의 만남으로 나는 산산히 부서졌고 다시금 태어났다. 지금의 나는 세포 하나하나에 막둥이를 품고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막둥이와 함께다.

지금의 내가 막둥이와의 만남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내가 다시 태어나기 위해 막둥이가 그렇게 죽었어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종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신의 뜻으로 그렇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한 생명이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희생당하기로 계획될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의 전쟁과 범죄, 아픔들이 다 어떤 뜻이 있다고 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렇게 연결짓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꺼라는 논리적인 귀결에 우리가 중독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막둥이가 나에게 온 것, 그리고 그렇게 보냈던 것에 대해 어떠한 이유를 찾는 것을 난 포기했다.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다만 '영원'을 믿지 않던 내가 '영원'을 바라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것을 이토록 믿게 된 것은 막둥이와 만났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신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사건을 통과하며 오히려 신에게 다가갔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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