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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달빛오두막] 운명과 사랑 그리고 구원 : 가시장미 공주 본문
추석을 앞두고 어느 때보다 밝은 달이 떠오른 9월 18일, 가시장미 공주(잠자는 숲속의 공주)와의 한달을 갈무리하는 달빛오두막 모임이 열렸습니다.
가시장미 공주는 불운의 뿌리에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주어진 운명적 저주를 풀어내고 극복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죠.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의 저자는 메인 스토리 뒤에 가려진 인물들의 서사를 섬세하게 드러내어 그들이 짜낸 운명을 풀어냅니다. 어쩔 수 없이 휩쓸린 운명의 파도에서 그들이 감당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변화를 위해 애쓰고 나아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 부모가 자식에게 건네는 심리적 운명
미성숙한 두 사람이 만나 아이를 낳습니다. 왕비는 어린시절을 저당잡힌 채 갑작스럽게 아내이자 엄마가 되어야했습니다. 왕은 아내가 느끼는 부담과 부채를 눈치채지 못했고 엄마역할에 몰두하는 그의 옆에서 함께 아빠 역할로만 지내게 됩니다. 왕비는 딸을 통해 어린시절을 다시 살고자했고 왕은 자신의 존재가 긍정되기 위해서 좋은 아빠로만 지내야했습니다. 이렇게 부모 모두 아이의 애정에 목메는 관계의 불균형 속에서 각자 내면은 기이하게 어그러지기 시작합니다.
왕비와 왕의 서사는 우리의 내면을 다양하게 자극했습니다. 실제로 어린시절에 대한 보상으로 딸을 간절히 원했었기에 왕비에게 강하게 감정이입이 되기도 했고 가시장미 공주의 상황과는 반대로 무심한 아버지로부터 관심과 애정을 갈망했던 어린시절이 떠오르기도 했지요. 그리고 다시금 우리는 어떤 운명을 아이들에게 건네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 거부된 여성성, 녹슨 자물쇠 뒤로 갇히다.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부부의 감정은 딸아이의 삶에 '여성성의 거부'라는 운명을 직조합니다. 특히나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딸에게 사랑받고자 하는 왕의 욕구는 딸이 성장함에 따라 성적 불안을 동반하는데, 이로 인해 딸아이의 생일날 13번째의 '지혜로운 여인'을 고작 금접시가 없다는 이유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희열과 기쁨일 수 있었던 성적 충동의 힘은 '거부당한 악'이 되어 공주에게 저주로 돌아옵니다.
내가 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언제나 어설픈 간극 속의 불안정한 부분이었습니다. 두렵지만 항상 궁금했고 머리로는 다짐하지만 몸은 따라가지 못했죠. 놀랍게도 그건 성생활이 겉으로 어떤 모습인가와 상관없는 뿌리깊은 불안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나 보니 욕구를 숨기고 수동적으로 침잠했든,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탐구했든 결국 우리가 스스로의 몸과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거부된 '지혜의 일부분'은 악마화되었지요.
자신의 여성성을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시장미 공주는 15살이 되어 탑 꼭대기에서 녹슨 자물쇠 뒤에 결박되어 있던 '여성의 본질'과 만납니다. 그리고 잠에 빠져들죠. 공주 뿐 아니라 왕과 왕비, 궁전 안의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 사물들까지 궁전 전체의 시간이 멈춰버립니다. 다행히 저주의 끝은 정해져있었습니다. 백년이라는 시간과 때맞춰 찾아오는 왕자가 저주를 풀어내지요.
:: 서로에게 거울이라는 자격으로 마주하다.
우연으로 보이는 '타이밍'은 사실 촘촘하게 짜여진 운명입니다. 소문만 듣고 공주를 구하러 돌진할만큼 왕자는 내면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식인 어머니가 쏟아내는 질식할 듯한 감정 요구와 책임의 압력에서 벗어나 잠자듯 편안할 수 있길 바랐지요. 공주에게는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드러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은 밖에서 보기에는 너무 길지만 스스로에게는 다만 적당한, 백년이라는 시간이었죠. 그리고 그 시간을 기다려 섬세하게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깨워줄 누군가를 기다렸습니다.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우리는 상대를 갈망하고 무섭게 빠져듭니다. 그런 강렬한 감정은 흔히 운명적 사랑이라고 불리지만 정확하게는 '사랑을 향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존재라는 퍼즐을 위한 조각을 찾으려 상대를 관계 안에서 '먹어치우기' 전에 그를 거울삼아 내 안에서 발견해야하죠. 우리는 그 시절 뜨거웠던 감정들을 돌아보고 지금의 관계에서 발견한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왜 항상 같은 면에서 그는 기겁하고 나는 반색할 수 밖에 없었는지 나와 그의 서사를 통해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부딪혔던 부분이 사실은 나를 각성시켜서 어린 아이에 머무르지 않게 성장시켜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 있어도 좋은 서로'가 되어주는 '사랑'이 시작되는 거겠죠.
:: 물려받은 유산을 풀어내는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변화
궁전을 가로막던 가시덤불은 왕자가 지나가자 자연스레 길을 비킵니다. 그건 아마도 백년후라는 타이밍 뿐 아니라, 아버지로 물려받은 공주의 불안을 조심스레 통과하는 왕자의 태도를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입맞춤이라는 가벼운 접촉으로 공주가 깨어나자 궁전 안의 모두가 깨어납니다. '깨어남'은 공주가 자신의 소망과 욕구에 대해 이해하고 인지하지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군다나 공주 뿐 아니라 궁전 전체가 깨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했어요.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아 답답했던 부분들에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당연한듯 주어졌던 성역할에 의문이 제기되고 이러한 집단 각성은 제도의 변화로도 이어지고 있지요. 아이들의 놀림노래에 구시대의 잔재로 남아있는 가사들이 이제는 현실과 너무 달라 섬뜻하게 느껴지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였던 시간 속에서 실은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수동적인 기다림으로 보이는 공주의 잠도 내면의 여러 과정들을 함축적으로 담아낸 상징일 것입니다.
이야기 속에서 공주와 왕자의 결혼생활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되 버리지만 우리는 이제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채우기 위한 갈급함으로 운명적으로 끌렸던 두 사람이 '너'를 품을 수 있는 공간을 내면에 마련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을 거라는 걸요. 내 안에 부족한 퍼즐조각 모양대로 상대방을 모양짓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시간을 지나 결국 서로를 거울삼아 나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다면 그제서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운명의 유산을 풀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 운명과 사랑 그리고 미래로 이어지는 구원
가시장미 공주는 미성숙한 부모가 자식에게 건네는 운명, 스스로를 성적 존재로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되는 여성성, 서로를 향한 끌림이 이야기하는 운명적 관계와 그 관계가 사랑이라는 구원이 되는 과정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삶의 운전대를 잡은 건 나 자신이고 문제는 의지일 뿐이라고 믿곤 합니다. 하지만 운명에 얽힌 것이 '저주'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저주라고 여겨졌던 결핍은 오히려 나만의 항로이자 동력이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처럼 우리 아이들도 전해지는 운명의 짜임 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게 되겠지요.
가시장미 공주 이야기는 온전한 나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잡하게 꼬인 운명의 매듭을 풀 수 있는 건 나의 의지를 넘어선 사랑이라는 구원이라고 말이지요. 내 인생이 나의 것만은 아니라는 이런 사실은 개인의 한계이자 힘입니다. 내가 누군가가 필요하듯 나 자신 또한 다른 이의 온전함을 향한 누군가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가족은 물론이고 내가 소중히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달빛오두막에서 나누는 각자의 이야기들이 서로를 건강하게 자극하며 우리 모두에게 이바지하고 있듯 말이죠.
다음 한 달은 머리 긴 소녀, 라푼첼을 만납니다. 풍성한 긴 머리카락이라는 강렬한 인상에 가려졌던 숨겨진 사연이 무엇인지 함께 들어보아요.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보고 있습니다. 현재 1기가 진행중이며, 2021년 12월경 2기를 모집합니다. (아래 링크)
https://forms.gle/8uoMKUZR9f5VbB2D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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