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는 가톨릭, 불교, 비신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여성 3명이 모여 '성경'과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을 온라인으로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느낌과 생각, 깨달음과 질문들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고 톡과 밴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를 위태롭게 유지하는 이야기가 이 세 부분에서 전개된다.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기까지의 고통이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과 여인들이다.
[여호수아기]
- 0105 여호수아기 3장까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가나안땅을 점령하기 위해 출발한다. 그 땅이 하느님의 약속의 땅이기에 그 곳을 침범하는 건은 마땅하다고 계속 이야기된다. 난 이스라엘인들보다 가나안지역의 사람들에게 마음이 계속 쓰인다. 내가 침략당한 땅의 자손이라 그런걸까.
'힘과 용기를 내어라'라는 든든한 말이 나쁘게 쓰일 때도 많다는 걸 알기도 하고.,
- 0106 여호수아기 6장까지
이스라엘인들은 예리코 성읍으로 들어갔다. 성읍을 하루 한 번 6일동안 돌고 일곱번째 날에는 일곱번 돌았는데 마지막에 함성을 지르자 성벽이 무너졌다. 정찰단을 숨겨주었던 라합가족만 살아남았다. 여전히 난 마음이 편치 않다.
- 0108 여호수아기 9장까지
예리코 성읍안의 모든 것들은 주님께 봉헌되어야 하는데 이를 빼돌린 아칸이 이스라엘인들에게 돌을 맞아 죽는다. 이후 아이를 점령하고 아이의 임금을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 분명한 목표 아래 자비는 철저하게 영역이 구분된다,
- 0111 여호수아기 11장까지
주님께서 약속한 땅을 모두 차지했다. 그 점령에 반한 지역 임금들은 모두 나무에 매달려 죽고 시체는 동굴에 넣어진다. 계속 예수님 처형이 떠오른다. 특별한 상징이 있는 것 같진않고 이 시대의 죄인처벌법이었던 것 같은데 연상되어 생각나는건 어쩔 수가 없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으로 받은 가나안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약속받은 땅에 대한 지독한 믿음...다른 이를 피흘리게 하는 믿음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안든다. 기독교인으로의 첫단추마저 힘들다.
- 0112 여호수아기 17장까지
땅 분배를 기록하다. 엄청 세세하게. 재산이 생기고 그것을 지파에 따라 나누는 과정은 이 때에는 그야말로 핵심역사. 넘 고유명사가 많이 나와서 이 부분들은 정독불가! ㅎ
- 0113 여호수아기 24장까지
땅의 분배가 끝나고 도피성읍과 레위가문에게 줄 땅을 구별해낸다. 하느님과 모세를 통해 재산분배를 약속받았던 이들이 모두 등장하여 제몫을 받아간다.
땅분배가 끝나고서는 하느님만을 섬길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하고 약속받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약속된 땅을 받았으니 마음이 나태해질까봐 긴장한 것 같다. 일부 자손들이 쌓은 제단이 작은 헤프닝을 일으키고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질투하시는 하느님'을 배신하면 생길 나쁜 일에 대해 계속 강조한다.
신과 계약을 맺었다는 게 갑자기 특이하게 생각된다. 다른 신과는 다르게 하느님은 인간과 관계맺는 신이다.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결혼관계와 비슷하다고 한 것이 떠오른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해봐야겠다.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여호수아기 부분을 읽고...
여호수아 앞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자와 내부인이 된 라합과 기브온 사람들, 내부인이지만 죄를 지어 내쳐진 아칸의 사례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규정하는 것은 민족성이 아닌 거룩함'이라고 해석하지만, 꾸역꾸역 예외사례에 매달려 희망을 가져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계속 드는 생각은 책에도 나왔듯 딱 요거다.
"순수하고 순전한 나라를 세우기위해 이스라엘 백성보다 더 나은 비전과 충성을 지녔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야했을까?"
[판관기]
- 0115 판관기 3장까지
판관기로 들어섰습니다. 지난 번에 도저히 성경 못읽겠다고 휴독을 선언했던 게 판관기(사사기)의 일부 구절을 어딘가에서 읽고 나서였거든요. 이제 견딜 준비가 좀 된 것 같아요.
이스라엘은 남은 가나안 지역을 정복하며 이민족들을 내치지 않고 섞여 살아가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들과 혼인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는 하느님과의 계약을 지키지 않고, 이에 노한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침략당하는 시련을 내리신다.
전쟁을 아는 세대, 전쟁을 모르는 세대의 구분에서 우리나라의 세대갈등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 구분이 하느님에 대한 신실함과 연결되는건 국가형성 시대엔 유의미했겠으나 지금은 아니겠다 생각도 들었다.
- 0120 판관기 5장까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시기인지 이민족들이 철병거를 사용하고 있어서 물리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번 장에는 그 철병거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이겼는데, 여성 둘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판관 드보라와 카인족 야엘이다. 적장을 꾀어 죽이는 여성의 이야기는 세계 곳곳 공통 서사인 것 같다.
그나저나 모세의 장인 이름이 호밥으로 나온다. 앞에선 이트로였고, 중간에 한번 또 다르게 나온 적이 있는데.. 장인이 많았던 건지..
- 0121 판관기 7장까지
기드온이 판관이 된 이야기. 주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고, 몇번의 증거를 원하고 이에 다시 믿음을 갖고 나아가는, 같은 패턴의 이야기들. 바알을 섬기던 동족의 제단을 부수는 자세한 이야기가 처음 나온다. 두려움에 밤에 행했다니 그 당시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 0123 판관기 9장까지
기드온이 미드안족을 점령한다. 미디안 임금 제바와 찰문나를 마지막에 죽이는데 이를 자기 어린 아들에게 시킨다. 아이가 어려서 이를 두려워하자 오히려 미디안 임금들이 조언을 한다. 어린아이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하다니...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아이에게 총 쥐어주는 거랑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드온은 임금이 되달라는 요청을 거부하고 금 전리품을 모아 '에폿'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를 받들어 불륜을 저질렀다고 나온다. 에폿은 사제가 입는 장식물인데 이를 '받들었다'는 것은 허상을 섬긴 죄를 의미하는 것 같다. 기드온이 죽자 그 아들 아비멜렉이 자신들의 일흔 형제를 죽이고 임금이 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기드온의 다른 아들 요탐이 산꼭대기에 올라 나무들의 이야기로 빗대어 상황을 한탄한다. 임금을 세우려는 나무들의 헛됨과 무의미함에 대한 것이다.
신과 인간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던 시기가 지나고 사람들 사이의 구분이 점점 싹트기 시작한다.
- 0125 판관기 12장까지
이스라엘인들이 다른 신을 섬기다 곤경에 빠져 다시 주님께 울부짖자 주님은 "너희가 선택한 신들에게나 가라."며 삐진 모습을 제대로 보인다.
판관 입타는 이제까지의 리더 중에 가장 논리적으로 적들에게 대응한다. 바로 공격하기 전에 사절을 보내 왜 이러는지 묻고, 이를 조목조목 반박한다. 그리고 주님께 승리 후 가장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이를 번제물로 바치겠다는 어이없는 약속을 한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이리 아무렇지 않은 시절이었단 말인가?
길앗인들과 에프라임인들의 갈등도 흥미롭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죽일 정도로 갈등하는 것이 이토록 적나라하게 나온 것도 처음이다. 발음으로 서로를 구분할 수 있다는 건 구분되어 산 시간이 그만큼 길었다는 뜻이겠지. 시간은 점점 흐르고 판관들도 많이 바뀐다.
- 0126 판관기 16장까지
삼손 이야기를 드디어 직접 읽다! 삼손이 판관이었구나. 삼손이 잉태되는 과정은 수태고지가 연상되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임신과 천사의 고지. 주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보냈다는 점이 그러했다. 예수님과는 매우 다른 인물이지만 적어도 탄생 배경은 그러하다. 삼손의 부모는 어쩔 줄 모르며 하느님의 천사에게 그 아이가 어떤 일을 해야하는지 묻지만 천사는 동문서답한다. 삼손의 역할은 필리스티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에 명백한 분노를 심는 일이었다.
- 0203 판관기 18장까지
그 시대에 임금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명확히 나온다. '이 때에는 판관만 있고 아직 임금이 없었나보다.'했는데 확실해졌다. 근데 이것이 미카가 집안에 자신만의 제단과 사제를 들인 점과 단 지파가 하느님의 계시없이 땅을 차지하는 점에 대한 설명처럼 보인다. '이 당시에는 중심을 잡아주는 자가 없어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자기 멋대로였다.'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단 지파의 어이없는 행패는 18장 27절에 한 문장으로 요약되어 있다.
" 그들은 미카가 만든 것과 그에게 딸린 사제를 데리고 라이스로, 조용하고 태평하게 사는 백성에게 가서, 그들을 칼로 쳐 죽이고 그 성읍을 불살라버렸다."
성경의 건조한 문체가 저 문장을 더 끔찍하게 만든다. 탄식이라도 했으면... 일상학자 연구를 하며 역사 속에서 나타난 페미니즘 원형의 흐름을 살펴봤고 그 과정에서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종교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게 인류의 심리적, 인지적 발달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나도 이해로 점점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해도 여전히 슬퍼하고 탄식하는 건 변하지 않을 듯 하다. 그걸 지금 시대의 인가사회에 적용하듯 분노하고 제가 휘둘릴 정도는 아니지만.
얼마 전 깨달은 건 내가 여성들의 이야기모임에서 함께 이야기나누는 모든 과정은 여성들의 경험들이 집단무의식에 남긴 슬픔과 억울함을 위로하고 살풀이하는 과정이라는 거였다. 울었어야할 일들은 영겁의 시대를 지났어도 누군가의 눈물을 기다리니.
- 0204 판관기 21장까지
드디어 그 구절에 이르렀다. 나는 어딘가에서 이 구절을 읽고 성경을 못읽겠다고 모임벗들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레위인 중 한명이 벤야민 지파의 지역에서 하룻밤 묵다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건달들에게 아내를 내어준다. 다음날 아침 문지방 위에 여자는 죽은 채 발견된다. 레위인은 이를 비통하게 여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아내의 시체 조간을 보내고, 이스라엘은 벤야민지파와 싸우게 된다.
이 때까지의 과정도 역겹지만 벤야민 지파를 굴복시키고 이후 화해하는 과정은 더하다. 벤야민 지파에 딸들을 줄 수 없는데, 이 지파의 맥이 끊기는 걸 슬퍼하며 방법을 강구하고 처녀들을 납치해서 자손을 얻을 건을 제안한다. 분노와 화해 과정의 그 어디에도 여성은 없다. 남자들이 분노한다. 내 권위를 욕보였음에.
오늘은 이름없는 레위인 아내를 위해 울어야겠다. 그가 남편에게 화가 나 친정으로 갔던 건 그의 선견지명이었나부다.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그는 알고 있었나보다. 오늘은 "그 시대에는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대로 하였다."이 구절이 위안이 된다. 쓰는 사람은 쓰면서도 알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어이없는 시대였는지..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판관기 부분을 읽고...
땅을 정복한 대가로 건네지는 딸 악사와 권위를 쉬이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 판관 드보라, 이방인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만 해석된 삼손 이야기의 들릴라, 신과의 맹세로 희생당한 입타의 딸 등 여러 여성 인물들은 이 시대에 여성들이 어떻게 대우받았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그 중 가장 처참한 건 남성들에게 짖밟힌 레위인 아내 이야기이다. 아무 잘못도 없이 죽게된 입타의 딸은 두 달동안 친구들과 처지를 슬퍼하며 스스로를 위해 곡을 한다. 그리고 이후로 이스라엘 딸들은 입타의 딸을 생각하며 나흘동안 곡을 한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그녀는 아버지의 맹세를 받아들였지만, 그와 동류가 되는 것은 거절했다. 그녀는 자신의 남은 날들을 자신을 알아주고, 이런 폭력적인 사회의 한가운데서 젊은 여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녀가 한 일을 잊지 않을 여자 동무들과 보낸다."
"벤야민 지파를 향해 일어난 이스라엘 연합군은 야훼에게 묻는 데는 신중했지만, 바른 지문, 곧 이들이 정말 싸우는 것이 옳은지를 묻는 데는 신중하지 못했다...폭력은 공공의 선을 위한 수단으로부터 무정부 상태를 만드는 무기로 변질되었다."
[룻기]
0208 룻기 4장까지
놀랍다! 여성 이름으로 된 성경제목이 있었구나! 룻기의 내용 자체는 앞서 끝없이 반복되었던 '끊어질 위기에 있는 가문 잇기 프로젝트'이나 여성 이름이 성경의 일부 제목에 등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남편과 아들들이 모두 죽고 두명의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며 나오미는 "너희를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나 쓰라리단다."라고 이야기한다. 여성들이 여성에게 보여주는 연민과 연대의 마음이 성경에 처음 나온 것 같다. 며느리 중 한 명인 룻과 다시 고향에 돌아왔을 때도 나오미는 깜짝 놀란 고향 아낙네들에게 '주님이 나를 거칠게 다루시고 나에게 불행을 안혀주었다고' 한탄한다. 이제까지 근근히 버텼던 마음이 고향 여성들을 만나자 한 번에 무너져내리고 툭 터져버린 느낌이다. 그건 나를 위로해줄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아니었을까.
이 부분을 읽으니 책방에 입고했던 책 중 '덴동어미화전가'라는 책이 떠올랐다. 조선후기 봄날 여성들이 모여 화전을 구우면서 자신들의 기구한 삶을 나누고 서로 위로하는 이야기이다. 덴동어미의 박복함이 나오미의 그것과 너무 비슷하다. 결혼을 할 때마다 남편들이 얼마 안가 죽었고 아들도 크게 다친다. 가난하게 근근히 먹고사는 삶. '남자'에 귀속되지 않은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나 마찬가지였겠지...그것을 위로하는 건 서로의 사연에 울고 손잡아주는 여성들이었다.
나오미의 며느리 룻은 보아즈라는 사람의 호의 덕분에 그와 결혼하고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을 아들을 낳는다. 보아즈가 룻과 결혼하는 과정이 무척 인상적인데, 밤에 침소에 들어온 여인에게 보아즈는 이성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고 그 약속을 지킨다. 보아즈가 처음 룻의 신랑감으로 점찍은 사람에게 룻과의 결혼을 제안하자, 그가 단번에 승락했다가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야한다고 하자 재산을 손해보는 것이 싫다며 거절한다. 즉, 보아즈는 룻과 결혼해 낳는 아이과 룻의 지참금인 땅을 모두 자신의 가문이 아니라 룻 쪽에게 양보한 것이다. 룻이 보아즈의 유일한 아내였는지, 아니면 여러 아내 중 한 명이었는지(아마도 이 쪽이 유력...) 확실치는 않지만 이 시대의 남성이 '결혼의 유일한 목적'을 포기한 흔치 않은 사례인 것 같다. 즉 보아즈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씨받이의 반대인 씨뿌리개 역할을 한 셈.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엘리멜렉의 자손이 된다. 와우! 사람이 의지를 내면 못할 게 없구나.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룻기 부분을 읽고...
잘못 알고 있던 게 있었다. 보아즈는 엘리멜렉의 친척으로 그 가문의 피가 섞인 인물이다. 죽은 자의 땅을 자신의 아이가 상속하게 되는 것인데 이에 대해 보아즈가 경제적 손해가 아니니 결혼을 결심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쨋든 가문의 입장에서는 재산이 이어지는 것이나 개별 가족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일 수 있었을테니...그리고 책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의 의미를 번역본들이 전혀 다르게 해석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내가 읽은 성경에서는 보아즈가 가문의 다른 남성에게 나오미의 땅을 사서 이어가겠냐고 물으면서, 룻과의 결혼도 제안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히브리 성경에서는 결혼은 '내(보아즈)가 한다.'고 써 있다는 것이다. 결혼과 재산 상속이 다르게 갈 수 있는 것인지...아니면 당연히 그건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보아즈가 자신의 결혼과 가문의 재산잇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위험수를 던진 것인지....오히려 이 부분을 읽으며 헷갈렸다.
그런데 명백한 점은 모든 혈통 문제가 해결되자 성경 안에서 룻의 이름이 쏙 빠진다는 것!
"집을 떠나 들판에서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은 무론 보아즈를 협상 자리에 끌어냈고, 나오미에게 두 번 거짓말을 했던 룻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한 셈이다."
"말과 행동으로 자신이 뀐 새로운 가족 안으로 나오미를 끌어안으려 애썼던 룻 자신이 마지막 순간에 본문에서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