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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유혹받고 용기내는 인류의 걸음들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창세기] 유혹받고 용기내는 인류의 걸음들

고래의노래 2020. 2. 11. 15:58

사람은 생각의 문이 열린 틈을 통해서만 정보와 경험을 받아들일 수 있겠지요. 여러 번 읽어보았던 [창세기]지만 지금의 저는 예전의 나와 다른 틈으로 성경 텍스트를 받아들였습니다.
요즈음 제가 <일상학자>라는 연구 프로젝트에서 연구주제로 잡은 '페미니즘은 발명된 의식인가 잃어버린 본능인가?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과거의 원형적 에너지일까 미래의 자기초월적 의지일까.'라는 것과 겹쳐지며 생각이 계속 이어졌어요.

가나안을 향한 아브라함의 이동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 창세기가 메소포타이마문명과 이집트문명의 교류, 만남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에덴의 위치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부근이라고 이야기되고 있는데 아브라함의 여정이 '에덴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시작하여 물길을 따라 돌면서 이뤄지네요. 문명끼리의 만남, 충돌, 화해 그리고 그 역사를 자기민족의 자존감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해석과 양념들이 느껴졌어요.
  •  자연스럽게 그 지역의 문명이 현재 지구의 중심세력, 문화로 이어져온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인류학적으로는 <총,균,쇠>에 나왔던 우연의 교차점들이 만든 역사가 떠오르기도 했고(살림님은 좋아하시지 않는 의견이나. ^^;) 종교적으로는 한 사람과의 계약으로부터 시작해 온 인류와 관계맺고자 하신 하느님의 '큰 그림'(?)이 보이는 듯도 했습니다.
  • 아담과 하와 이야기에서 강조하고자 한건 어쩌면 "인간이 왜 죽을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한 기독교의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간이 왜 유한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여러나라의 다양한 신화가 있고, 그 중 일본에서는 라헬과 레아 이야기와 정말 비슷한 포맷의 것도 있더라구요. 예쁜 동생만 신부로 맞이하고 못생긴 언니는 거부한 한 남자인간으로 인해 '영생'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예요. 인간의 유한성에 이유를 마련하고자하는 고민이 느껴졌습니다. 전세계 신화의 여러 부분들과 성경의 이야기들이 겹쳐지는 부분들도 꽤 있었는데, 요셉이 꿈에서 하느님과 씨름을 하고 엉덩이뼈를 걷어차이는 것은 많은 문명에서 신과의 연결자(제사장, 영매)를 절름발이로 묘사하는 것과도 이어진다고 합니다.
  •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에서 하와와 성경 속 여성들을 적극적인 변혁의 창시자들로 해석한 것은 여성을 '악의 씨앗, 악으로의 유혹자'로 해석하는 시각과 묘하게 겹쳐졌습니다. 그것은 악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로 인해 연결되는데, 규칙을 벗어나게 하는 유혹을 악이라 할 때 이는 '인간이 스스로 용기내지 못할 일을 하게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이건 <파우스트>에서 괴테가 악을 바라보는 시선, 칼 융이 해석한 신의 한 면으로의 악과도 이어지더라구요. 양극단이 생각의 끝에는 결국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또한 이렇게 이어지는 듯 보였고 그건 요즈음 저의 고민과도 연결되었어요.
  • 그래서 '원죄'라 이름 붙여진 그 변혁행위를 '죄'라는 단어가 주는 편향된 감정 안에서만 해석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나와 너를 구분하여 인식하게 된 것은 불행의 시작이면서도 내가 너와 연결된 존재라는 걸 '스스로 깨닫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과정인거죠. 하느님과 '관계맺기'가 가능해진 것도 이러한 구분 '덕분'이며 그야말로 살아지는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지어가는 가운데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엄청난 시작점인 것입니다.
  • 그렇게 연결되었던 것을 구분하고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쪼개고 들추는 과정이 인류사이며, 성경도 그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성한 말씀으로의 성경은 여전히 저에게 의미있지만 그 계시가 오는 방향은 비단 하늘 위가 아닐 수도 있다는거죠.
  • 또한 여성성을 자연, 대지로 상징되고 이를 극복하고 문명으로 나가는 것을 남성성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홍수, 가뭄같은 자연재난을 신에게의 간청을 넘어 인간의 기술로 극복하려는 시점과 맞닿아있는 것 아닌가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수용적 믿음이 창세기에서는 남성들의 성향이었다가 신약에서는 성모님의 것으로 바뀌는 것도 지금 보니 의미있어 보였습니다.


언어가 생각을 명료화하고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다는 걸 믿었고, 지금도 물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깊이 느끼고 있기도 해요. 말은 구분이고, 그러한 확실함으로 인식되는 세상은 정말 일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페미니즘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뚜렷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개인적으로 점점 힘들어지네요.


페미니즘은 변혁의 힘이고, 그것은 인류가 용기내지 못하는 일을 하게하는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유혹자'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구분짓고 인식하는 남성적 문명은 여성해방이라는 또 하나의 구분을 넘어 연결과 연대로 나아가는 페미니즘 앞에서 ‘과제를 받은’ 셈이
겠지요.

*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는 개신교, 가톨릭, 불교, 비신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여성 4명이 모여 '성경'과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을 온라인으로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느낌과 생각, 깨달음과 질문들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고 톡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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