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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내 안의 힘을 바깥으로 돌리는 역사의 지점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레위기 / 민수기 / 신명기] 내 안의 힘을 바깥으로 돌리는 역사의 지점

고래의노래 2021. 1. 5. 15:28

*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는 가톨릭, 불교, 비신자 등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을 가진 여성 3명이 모여 '성경'과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을 온라인으로 함께 읽는 모임입니다. 각자의 속도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느낌과 생각, 깨달음과 질문들을 각자의 블로그에 남기고 톡과 밴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읽기 모임 톡방에 올렸던 내용을 모아 모세오경 읽기 후기로 갈무리하려한다. 여성혐오의 서사 앞에서 한 줄도 읽기 어려웠던 상태를 지나, '어디 한번 또 뭔 소리하나 들어보자!'는 뱃심을 갖게 되기까지, 함께 읽는 벗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참으로 천천히 진행되고 있지만 성경을 직접 읽고 알아간다는 것은 역시나 의미있다. 신과 나, 나와 남을 구분하고 내 힘을 바깥의 조직에 이양하는 과정이 전개되는 모세오경의 이야기를 만났다.

[레위기]


*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레위기 편

구약은 가부장 문화의 표현이라고 확실히 밝히고 들어간다. 아직 성장하던? 인류의 한 시점이라고 접고 들어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구분'의 시기가 도래한다. 이스라엘인들은 다른 민족들과 자신들을 구분해나가며 공동체를 견고히 한다. 이 과정에서 안에서의 구분도 일어나는데, 통제할 수 없는 신체현상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기에 '괄호치기'를 통해 제쳐둔다.

"제사의 목적은 우주의 균형을 방해하거나 방해의 위험에 처하게 하는 어떤 사건이나 상태를 중화함으로써 질서를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것이다....고대 문화들은 어떤 신체적 상태들 혹은 과정들이 인간이 직접적으로 신에게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는 명백한 부정상태를 야기한다고 믿었다...제의적 정결과 부정 관념은 일반적으로 특정한 육체적 상태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지식의 결여로 인한 것이다."

"경고의 요점은 이스라엘인들은 반드시 성 관습뿐만 아니라 음식법에서 주변 국가들과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이스라엘인들은 개인과 국가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삶의 두 측면, 즉 음식과 성에 관한 엄격한 제의적 정결법을 준수함으로써 하느님을 닮아 스스로를 구별할 것을 요구받았다."

[민수기]


- 0923 민수기 12장까지
모세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주님은 구약에서는 아직 그리스신들처럼 부족한 인성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백성들이 고기 좀 먹고싶다고 했기로서니 저리 유치하게 응징하게 뭐람.

- 0924 민수기 14장까지
모세의 힘겨운 중재가 이어지고, 그 중재로 유대인들은 파멸대신 떠돌이 생활이 연장된다.

- 0925 민수기 16장까지
코라의 반란에 숨통이 트인다. 저 말대로라면. 실제로는 모세 말대로 권력을 탐한 걸 수 있겠으나..

- 0928 민수기 18장까지.
의심하는 무리를 주님이 불살라처단한다. 이게 과연 주님의 힘이었을까, 아님 주님의 뜻을 등에 업은 인간들의 행위였을까. 기록은 항상 승자가 하기에...
이 몇번의 반란을 잠재우고 사제들과 만남의 천막 수행자들이 확실히 정해지고 보상체계도 완성된다.

- 0929 민수기 20장까지.
무언가가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였을까. 죽은이와 그 물건을 접한.사람이 부정해진다는 건 뭔가 병에 걸릴 위험성에 대해 염려해 공동체에 번지는걸 막으려 격리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월경이나 성행위로도 '부정'이 확대되는걸 보면 죽음, 성이라는 초월성에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한 듯도. 그렇다면 격리는 그 의미를 곰곰히 품으라는 것일까.
므리바의 물 에피소드에서 주님은 불평하는 무리 앞에서 모세와 아론이 기적을 일으키게 하는데, 과정으로는 "날 믿지 않았다"고 질타한다. 이게 어떤 뜻인지 잘 모르겠다. "주님이 물을 주실 것이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 물을 나오게 하랴?"라고 말해서 그런걸까? 주님을 드러내지 않아서? 믿음이 없다고 자꾸 불평무리를 탓하는데, 죽어갈 때쯤에야 먹을 걸 주는 이유는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란건가? 불평이 질문이고 요구라면 이는 정당하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뭔가? "말하기 전에 해줄려했어! 쳇!"요런 심보로밖에 안보이는구나. 불평, 질문없는 인내가 믿음인거냐!

- 0930 민수기 22장까지.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빌라암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유대인인가?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을까? 그 뒤에 신탁 내용이 나온다는데 흥미진진하다. 더 읽고 싶었지만 참음. ㅎ
얼마전에 읽었던 기생충에 관한 책에서 성경구절에 언급되는 기생충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부분이 민수기 21장 4~9절이다. 불뱀이 불평하는 백성을 치고 그 치유책으로 구리뱀을 기둥에 메달아두었다는 것. 기생충 책에서는 이는 메디나충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오염된 물로 감염되는데, 다리 쪽으로 뚫고나와 산란을 하며 그.과정에서 극심한 통증이 있어 예부터 '불타는 바다뱀'에 물렸다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다. 치료법은 메디나충이 다리를 뚫고 나올 때 막대기에 묶어서 다 나올때까지 기다리는 거라고! 의사협회의 상징인 기둥을 휘감은 뱀이 그 상징이라고 한다. 불평하는 무리를 쳤다는 주님의 진노는 기생충전염, 자연재해 등 큰 무리의 사망을 설명하는 시도였을 것이다.

- 1001 민수기 25장까지.
빌라암이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빌라암의 이름이 '친족을 삼키는 자'라고 한다. 성경 해석을 해보면 모압왕이 준다는 대가에 마음이 휘둘린,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긴하나 인간적인 진실함은 없는 인물로 나온다. 난 가만히 있다가 당해야하는 모압왕 종족이 안쓰럽다.
m.catholictimes.org/mobile/article_view.php?aid=273510

- 1002 민수기 27장까지.
모세의 형과 누나가 아론과 미리암이라는 걸 이제야.확실히 알게됨. 혈육이.아니라 그저 공동체에서 이야기하는 '형제' 의미라고만 생각했었다. 아기모세를 강가에 띄워보낸 누이가 미리암이구나.
그 유명한 츨롭핫(슬로브핫) 자매들의 소송 이야기가 나온다. 개신교 성경의 용어와 이름들이 더 일반적 알려져있어서 천주교성경(개신교랑 함께 만든거라고는 하는데) 을 읽으면 항상 매칭 작업을 해야한다. 우리나라 안에서만이라도 좀 통일하면 좋을텐데... 그 시도를 했던게 저 성경이었는데 지금은 천주교만 쓴다고한다. 개신교의 다양한 교파를 한 방향으로 통일하기가 힘든 것 같다. 마치 12지파들같기도하고..

- 1005 민수기 30장까지.
제사 제물 규정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여성의 맹세가 아버지와 남편에게 달려있음이 진부하게 반복된다..

- 1006 민수기 32장까지.
공동체가 새 땅을 차지하고 그것을 나누는 이야기들. 에돔을 지나갈 땐 전쟁하지 않고 부탁하고 거절당하자 빙~ 홍해까지 내려가 돌아가는 길을 택한 이유가 에돔이 야곱형제 에사우 종족의 지역이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다른 종족은 그냥 전쟁! 지역을 차지하자 그 땅을 받아 머물고싶어하는 지파도 나타나고..흥미롭다. 이제 그렇게 갈구하던 가나안 땅이 요르단강 건너편에 보이는 시점!

- 1007 민수기 34장까지.
가나안 땅에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내치는 단 하나의 근거. 하느님이 주셨으므로. 구약에서 하느님은 인류의 하느님이 아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 1008 민수기 마무리.
실수로 살인한 자가 재판받기 전에 머무르는 도피성읍에 대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결과가 아니라 '의도'를 죄와 결부짓는 도덕의 변화가 느껴진다. 근데 대사제가 죽을 때까지 도피성읍에서 지내야한다니...그냥 감옥같은건가?
살인 이야기에 이어 '피는 땅을 더럽힌다'는 하느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살인이 피를 보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걸로 자연스레 이어지나, 살인하지 않고도 피흘리는 여성들에겐 다른 기준을 적용할 줄 모르는 답답함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듯.
츨롭핫 딸들이 시집갈 때 재산이 다른 지파로 가는 게 그리 걱정이라니, 마지막까지 참 집착한다싶다. 같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지파들 구분이 그리 중요한 건 왜 그런걸까. 역할을 구분하고 지파별로 재산을 나누고...같은 민족이었어도 철저히 구분된 느낌.

* <여성들을 위한 성서주석> 민수기 편
땅을 넓혀가면서 재산분배의 문제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재산에는 여성의 생식력이 핵심변수가 된다. 상속의 문제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명확히 하는 것과 깊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츨롭핫 자매의 이야기가 여성권리에 대한 예가 아니라 남성권리 보존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충격적이었다.

"'츨롭핫' 자매의 이야기가 살아남은 것은 문제의 근본 핵심이 '아버지의 이름'을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는 아들을 낳지 못한 불행한 남성을 위한 위로의 이야기로 보존되었다...이야기의 속편에서 초점이 변경되었다. 갑자기 아버지의 이름 대신 땅과 권리가 주된 관심사가 된다."

[신명기]


- 1013 신명기 2장까지.
모세가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이제까지의 여정에 대해 돌아보기를 한다. 매우 '결과로부터의' 돌아보기임이 느껴진다. 앞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싸움에서 졌을 때는 일단 하느님이 전쟁을 허락하지 않았던 걸로 해석하고 있다. ^^;;

- 1014~15 신명기 6장까지
가나안 땅을 앞두고 계속되는 모세의 당부. 유언과도 같은 절박함이다.

- 1016 신명기 8장까지.
구복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잘먹고 번성하기 위해 섬겨라 아니면 화를 입을지니. 네가 살기위해 남은 동정하지도 말고 혐오해라. 구약은 어느 한 민족의 편협한 역사서..라는 이 생각이 뒤에 가면 좀 깨지려나.

- 1019 신명기 10장까지.
유대인들에게 침략당한 그들은 어디가 악했을까. 궁금하다.

- 1020 신명기 12장까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세트로 묶였다. 따르지 않으면 멸망. 하느님의 사랑은 구약에서는 조건부이다.

- 1021 신명기 14장까지.
구약의 신은 배신을 두려워한다. 그건 공동체 지도자들이 그렇다는 뜻이겠지. 정결한 새는 먹을 수 있다면서 온갖 새들을 제외한게 웃기다.

- 1022 신명기 16장까지.
계속 이어지는 규정들. 가난이, 소외된 이와 함께 할 것, 공정하고 정의로울 것을 내세우나 그것은 울타리 안의 정의일 뿐이다.

- 1023 신명기 18장까지.
임금이 하지 않아야할 것을 하게 되면 어찌 해야할까? 그런 말이 없다. 역겹다는 단어는 올바른 번역일까? 단어 하나하나의 결이 중요한데..과연 성경에 저 단어가 쓰신게 맞을까? 싶은 단어들이 많다.

- 1026 신명기 20장까지.
점령하려는 성읍의 나무를 다루는 규정이 인상적이다. 열매가 있는 나무는 존중하는데, 열매가 없는 나무는 쓰러뜨려 사용해도 된다는 건 어떤 가치에 집중한 걸까? 딱 보기에 유용함이 기준인 것 같은데, '들의 나무는 포위할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문장이 가식적으로 느껴진다.

- 1028 신명기 24장까지.
이건 내가 왜 읽고있지...라는 생각이 계속 멤도는 문장들이 이어진다. 역겨운 악을 처단하는 권리가 하느님 이름으로 인간들에게 주어졌다. 기독교의 온갖 못된 짓의 근간이 되어왔고 지금도 기능하는 부분들이 이어진다. 욕이 나온다..

- 1029 신명기 26장까지.
신성한 음경이여...아이들에게 구약은 읽히지 말아야겠다.

- 1030 신명기 28장까지.
신은 '남자들'에게 계명을 내린다.

- 1104 신명기 32장까지
간만에 꽂힌 구절. '말씀은 가까이에 있다.'

* <여성들을 위한 성서주석> 신명기 편
이스라엘인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까지 영역을 넓히며 그 지역의 여신문화들을 배척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다. 남녀를 떠난 통합적 창조력의 상징이었던 여신은 미개한 우상숭배로 여겨졌고, 가부장적 신이 영향력을 뻗히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아세라'와 '남녀옷 바꿔입기'에 대한 금지가 그러한 상징이었다는 걸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쉽고 슬픈 인류사의 지점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이 가지고 있던 의미를 모르는 바도 아니기에 이제 제대로 바라보고 잘 해석해보려 한다.
신명기에 이르러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영향력은 더 커지고 가족과 성 등 개인적인 부분의 처벌 주체가 되간다. 개인의 귄위는 점점 조직에 흡수된다. 국가가 탄생하는 시점이다.

"이스라엘의 몇몇 백성들은 아세라를 야훼의 여신-아내를 표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아세라는 본성과 생산력에서 하느님의 내재의 상징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발견된 나무줄기와 가슴을 지닌 작은 신상들은 하느님의 비옥한 현존을 햔한 욕망의 가정용 형태였을 것이다."

"다른 성의 옷을 입는 것을 금하는 것에서 아시된 남녀에 대한 의식적인 구별 역시 아시리아 시대의 종교적 갈등의 일부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여신 이난나/이슈타르 제의가 옷 바꿔 입기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아래를 율법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보는 것은 오직 본문이 성적 욕망을 고려할 때 뿐이다. 다른 행동 영역에서는 십계명과 신명기의 율법은 여성을 자발적 존재로 다루며 종종 그녀들의 권리를 보호한다."

"신명기 율법에서는 아버지의 특권이 사라지고...부모의 힘이 닿을 수 있는 최저점을 제시한다...신명기에서 가정과 가부장으로부터 장로 공동체의 공적 영역으로의 권위의 이양을 보게 된다."


* 모세오경을 다 읽고...

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신명기 편까지 읽고 성경은 진정 다각도에서 입체적으로 살펴봐야하는 책이라는 걸 느꼈어요. 밴드에 오래전 남겨주신 신명기 등 모세오경에 대한 모임벗들의 후기도 찾아읽고 있습니다. 이 속도로 가서야 언제 다 읽지 싶은데 그래도 함께 해주시는게 정말 힘이 됩니다. 감사해요~
구약 속에서 여성은 계속 대상화되고 억압되지만, 현재를 사는 저는 하느님의 존재를 여성들과 이야기나누면서 만나고는 했습니다. 여성이 억압당했던 안타까운 과거를 인류사의 과정 속에서 제대로 이해하면서 다시 이런 상황이 반복되지 않게 깨어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내 안의 여신찾기>모임에서 저는 모임벗들과 우리의 몸을 함부로 대했던 그 시절의 그들과 거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우리에 대해서 슬퍼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렇게 애도를 하며 우리 각자에게 떠오른 건 후회와 원망이 아니라, 그 시절 우리에 대한 애틋함이었어요. 의식하지 못해도 몸이 질환으로 말해주던 우리 안의 분노들, 불편했던 감정들과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던 직관까지 이 모든 게 우리가 스스로를 방어하려 참 애썼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나를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었구나! 싶더라구요. 꿈모임을 할 떄 꿈의 메세지에서 받은 메세지도 딱 그거였어요. 난 나를 포기하지않는구나. 절절하게 사랑하는구나! 저는 여기에서 '나를 사랑하는 나'를 하느님으로 바꾸면 딱 성경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누군가를 위하는 나의 진실한 희생은 '내가 내 자신으로부터 충만해야'가능하다는 것, 또한 이제 저는 알겠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변화를 위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자신을 향한 작업들이 꼭 함께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골방이나 광야같이 자극이 없이 단조로운 곳에서는 내면에 집중하게되고 그러면 환시, 환각이 들리기 쉽죠. 그래서 그런 척박한 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수행을 하는거라고 생각합니다. 전 그게 예언자들이 말하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해요. 바깥의 감각으로서 느낄 수 있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 안의 권위있는 목소리요. 밖에서 보면 어이없이 보일 수 있지만 "그럼 결국 자기 환상이네! "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도 없다고 봐요. 그게 하느님이 아니라고 누가 단정하겠어요. 전 출산 때 '내 안의 목소리'를 느꼈던 것 같아요. 막무가내로 믿어졌어요. 난 역사이래 모든 암컷들의 출산력과 연결되 있으므로 날 믿고 내가 원하는대로 하면 될꺼다..이런 믿음이 올라오더라구요.

어제는 견진을 준비하는 첫째 덕분에 함께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제 아이가 교리수업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하늘나라에 대해 그저 죽어서 가는 곳으로만 알고 있어서..교리 때는 어떤 걸 알려주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나라라면 그건 어떤 곳일 것 같은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온다는 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되는지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제 마음 속에 정리되는 부분이 있어 너무 좋더라구요. 그러면서 저녁기도는 정말 진심으로 하게 되었어요. 첫째에게 엄마가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을 크지만 미사를 안나가는 것에 대해 이해가 안되지 않는지..살짝 물었는데...감을 잡고 있는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구요. 앞으로 기도하면서 살짝살짝 그 이야기를 꺼내놓아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기도를 진심으로 하니, 아이들도 태도가 경건해졌어요. 당연한 거겠죠. 오늘 이 경험을 통해 아이들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사랑을 알려주고 싶네요. 어제 기도 중에 하느님께 다가가고 싶지만 미사는 참석하지 못하는 제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진짜 하느님과 대화하는 기분으로요. 그러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구요. 어떤 것도 넓게 품으시는 존재가 하느님이니 좀 솔직해져도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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