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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5기 마무리 에세이 : 다시 바라본다. '어디'가 아닌 '무엇'으로. 본문

내 안의 여신찾기/여신모임 5기 2020 가을

5기 마무리 에세이 : 다시 바라본다. '어디'가 아닌 '무엇'으로.

고래의노래 2021. 1. 8. 20:01

 다섯번째 여신모임을 마치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른 한 단어는 '힘'이었다. 바깥의 힘을 쫓아 애쓰고 헤매다 내 안에서 전혀 다른 힘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어디'가 아니라 '무엇'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힘은 '어디'에 있는가


 어린시절, 밤이면 물건 부서지는 소리와 부모님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위험한 세상을 형제도 없이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나는 잠 속으로 도피하려고 베개로 귀를 막았다. 엄마로 대표되는 여성은 힘없이 당하는 존재로, 아빠로 대표되는 남성은 자기 마음대로 힘을 휘두르는 존재로 보였다. 내 마음 안에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지향이 생겼다. 

 '여자이고 싶지 않다. 남자가 되고 싶다.'

 여성이라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여성으로의 신체변화가 두려웠다. 여성의 몸은 나쁜 손을 끌어들이는 유혹체였다. 어떻게든 감추고 숨기려 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내 몸은 천식과 아토피라는 면역질환으로 드러냈다. 세상에서 편안하게 숨쉬기 힘들다는 걸, 나와 세상의 경계(피부)가 언제나 긴장상태라는 걸 몸은 말해주었다. 바깥을 경계하느라 잔뜩 날이 서서, 나를 보호해야할 내 면역체계는 내 몸까지 해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과 화해해야만 하는 과제를 안고 살았던 셈이다. 

 게다가 방문 밖에서 벌어지는 가정폭력의 현장에서 엄마를 구하지 않고 잠으로 도피한 것에 대해서 나는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격정적인 감정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이 감정은 놀랍게도 악순환의 근원적인 배경이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번졌고 '행복이 불편한' 마음으로까지 이어졌다. 누군가를 지키기위해선 힘이 필요한데, 그 힘을 얻으려면 사회계급의 피라미드 위로 올라서야만 했다. 서열화된 질서 안에서의 노력은 약자를 만드는 시스템을 더 가열차게 작동시킬 뿐인데 말이다. 힘을 얻기 위해 부단히 애쓰면서도 괴로운 이유는 이 악순환에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던 나의 문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문제의 다른 부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진정 치유되길 원하는지, 중독된 사고체계를 벗어나 내면의 목소리를 듣길 원하는지 깊이 생각해보니 놀랍게도 대답은 '아직 두렵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를 버린다는 건 나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로 여겨졌다. 힘이 없으면 내가 위험해진다는 믿음이 너무나 강렬했기에 살아남기 위해 악을 썼었다. 높은 성적, 좋은 대학, 누구나 알만한 직장...내가 아는 '힘을 얻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다른 방법으로도 내면의 힘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수없이 들었지만 지금 쥐고 있는 썩은 동앗줄을 놓아버릴 용기가 아직 나지 않았다. 


힘은 '무엇'인가


 나에게도 세상에 맞설 힘이 있다고 믿어보려 했지만 아귀가 맞지 않고 덜그럭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볼 필요를 느꼈다. 내가 바라는 힘과 내 안에 있는 힘이 무엇인지, 힘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매달려온 힘은 남성적인 가치로서의 힘이었다. 물리적임 힘, 사회적인 힘, 관계에서의 힘이었고 바깥을 향한 힘이었다. 내 안에 없는 그 힘을 다른 쪽으로 과하게 투사하기도 했다. 나는 연예인에 빠지면 과하게 몰입하는 편인데 이제까지 좋아한 연예인들에 공통점이 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바깥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감정이 내면의 공허함을 채우기 위한 투사라는 걸 알게 되자 좋아하는 감정이 깊을수록 괴로워졌다. 그냥 편하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내 부족함에 대한 자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성성은 힘없는 수동성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난 여성이고,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이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했다. 내 괴로움이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많이 엮여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복잡하게만 보였던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의 경험을 나누고 싶어 여신모임을 시작했었다. 그런데 '아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야 했다. 여신모임을 통해 내가 알아간 것은 여성들이 통과하는 어둠의 시기가 전하는 의미였다. 예전에는 여성이라서 겪는 어둠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이, 인종, 성별 등 주어진 조건 때문에 겪는 괴로움은 없어야 한다고 말이다. 억압의 형태와 결과에 대해 일정한 상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여신모임에서 모임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무 상처도 만들지 않는 무결점 환경이란 없으며 비슷한 상황에서도 여러 다른 선택들이 일어나므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결국 '나의 서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삶의 진실만이 우리를 치유하고, 시공간을 넘어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슴으로 와 닿는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서사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끼리 나누는 위로과 응원이 그 무엇보다 강력하다는 것 또한 경험했다. 

 여성임을 거부했던 사춘기 시절에도 유일하게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던 여성의 생명탄생능력이 나의 어둠과 맞닿아있으며 그 힘으로 인해 내가 한없이 취약해졌었다는 것을 이제 알겠다. 나와 내 진심 사이를 가로막는 '바깥으로부터의 억압'과 진심에 닿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어둠의 시기'를 구분해야만 한다. 그 구분을 통해 수동적이고 취약한 상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나에겐 여성성의 힘으로 다가왔다. 

- 나는 여성이다. 
- 나의 치유는 오래 걸릴 것이다. 
- 나는 영원히 상처주고 상처받을 것이다.  
- 극복하지 않고 통과하게 허락할 수 밖에 없는 고통이 존재한다. 
- 내면의 소리는 행복,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함을 향해 인도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알게 되었고, 이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멈추고 다시 바라보았다. '어디'가 아닌 '무엇'으로

 


여성으로서의 나와 화해를 시작하다


 5번의 모임 안에서 선택한 핵심가치가 '에너지 분출 - 영향을 미침 - 통합 - 깨어남'을 지나 이번에는 '활력'에 이르렀다. 바깥으로 폭발했던 에너지가 내 안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초반에 밖으로 토해낼 수 밖에 없었던 에너지는 아마도 분노와 억울함, 슬픔처럼 내 상태를 자각하고 나서 처음 갖게 된 격한 감정들이었던 것 같다. 그 힘이 누군가를 흔들고 나를 깨운 후엔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되돌아온다. 온전한 치유는 분노를 다 경험한 후에 가능하다는 책의 이야기를 알 것만 같다.   

 나는 여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여성들과 함께 일하고 모임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축복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점점 쌓여가고 있다. 그러던 중 최근 의미있는 변화가 생겼다. 연예인을 투사없이 좋아하게 된 것이다. 성별구분이 가지 않는 고운 춤사위를 가진 가수를 보고 삶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남성성의 힘을 넘어선 '생기'에 끌렸다. 내 부족함을 인식하게 되는 괴로운 투사가 아닌, 즐거운 덕질이 시작되었다! 

 


여성이 가진 근원적인 힘에 닿기를


 달뒤님이 여신모임이 끝난 후 각자의 여신카드를 뽑아주셨을 때 내 카드로 뽑힌 것은 릴리트였다. 아담의 첫번째 부인이었다고 하는 릴리트. 남성에 종속되지 않았던 태초의 여성. 달뒤님은 이 카드의 메세지로 "Take back your power!"라고 적어주셨다. 여성 원래의 힘, 그 힘으로 돌아간다. 나는 계속 힘을 쫓았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감에 좌절했었다. 그래서 그 힘을 내 안에서 찾고자 다시 노력했다. 여전히 힘이 '어디에'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거다. 그런데 문제는 그 힘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었으며, 나에게 이미 있는 '여성의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단 걸 알게 되었다. 

 

 과거를 통해 지금의 나를 인식하고 미래를 꿈꿔본다. 내 미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든 가능성 안에서도 한계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꿈꾸면서도 현재에 충실하며, 운명을 믿으면서도 의지를 잃지 않는 것, 그렇게 순간순간의 적정선을 찾아서 결국 삶이 챗바퀴가 아니라 나선으로 나아가게 선택하는 것, 그것 뿐이리라. 


 '위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힘이 부족하다.'고 믿으며 잔뜩 긴장했던 내 어깨를 가만히 쓸어주고 싶다. 남성의 힘만을 힘이라고 여긴 이제까지의 믿음에 균열을 내고 무장해제할 용기를 갖고 싶다. 여성으로서의 내가 가진 힘을 내 것으로 긍정하고 싶다. 내가 여성이어서 겪게 된 모든 것들을 이제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운명에게 순종하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운명이 허락한다면 여신들의 섬인 제주도에 '달빛오두막'이라는 여성들의 공간을 만들고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남성들의 논리에 몸과 마음을 구겨넣다가 지친 여성들이 나만의 서사를 가진 빛나는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 [내 안의 여신찾기] 모임은 3개월동안 두 권의 책을 읽고 생애주기별로 삶을 돌아보면서 내면의 힘을 발견해가는 여성들의 내면 여행 모임입니다. 매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며 6기는 2021년 9월에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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