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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다섯번째 - 일상+연구 공유서 : 구분짓고 연결하기 본문

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공부 프로젝트, 일상학자

다섯번째 - 일상+연구 공유서 : 구분짓고 연결하기

고래의노래 2020. 4. 30. 18:42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다보면 결국 나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걸까. 이 연구가 왜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쫓다가 수렁 속에 빠진 기분이다. 잘 빠져있어 보는 것. 그게 필요한 것 같다. 

 

#스마트폰 중독

나는 지독한 스마트폰 중독이다.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스마트폰으로 이런저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하다보니 더 심해져서 거의 10분에 한 번씩 쳐다보는 수준이 된 것 같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으며 중독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걸 계속 모임에서 이야기했으면서 나는 또다른 중독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내 의지없이 의존하는 모든 상태를 무언가에 중독되었다고 할 때 스마트폰 중독은 명백해보인다. 

 

안그래도 고민하고 있던 차에 아래와 같은 뉴스를 읽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2267740

 

하루 8시간, 스마트폰 안 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스마트폰 디톡스 66일 도전기 ①] 화장실 갈 때도 만지작... 나 완전히 중독됐구나 [오마이뉴스 황보름 기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news.naver.com

멀티태스킹과 보상에 의한 학습법이 스마트폰 중독의 기저에 있다는 내용. 요즈음 책을 읽을 때도 집중하기가 힘들었는데 중독증상이었다. ㅠ.ㅜ 스마트폰으로 업무하는 시간을 정해두어야 겠다. 

 

 

#시간계획이 필요하다

 개학은 아직 하지 않았고 여전히 멀어보인다. 할 일은 있는데 아이들 옆에 있어야 하니 나는 집에서 컴퓨터를 항상 켜놓고있게 된다. 책을 읽어주다가 아이가 잘 논다 싶으면 바로 방에 들어가 업무를 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들어와서 말을 걸며 자기의 작품을 보여주는 아이에게 맞장구를 쳐주고 또 다시 업무. 집중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에 기댄 채 아무 것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 또 혼자 억울하고 분노하고. 내가 믿지 않았던 건 결국 나 자신이었다. 일단 시도를 해보자!

시간표를 다시 짜보았다. 아이에게 한시간 정도 엄마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각자시간을 보낸 후 만나는 것을 제안해 보려한다. 

  • 오전 10시 ~ 11시. : 첫째 숙제 봐주며 성경읽기

  • 오후 1시 ~ 3시 : 책방업무, 스마프트폰 업무 (이 때 둘째와의 협상이 필요!)

  • 밤 10시 ~ 11시 : 책읽기

 

#몸…

 중독에서 벗어나려면 몸과 마음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목 뒤가 항상 뻐근하고 자고 일어나면 온 몸이 뻣뻣하다. 유튜브 홈트나 스트레칭을 따라해봐야겠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영상을 보기 꺼려진다는 이유도 계속 이도저도 못한 채였다. 그냥 같이 보고 같이 하자!

 

 

#맥락 속에서 이해하기

 태도가 전부이고, 맥락만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맥락에서 내가 선택한 것을 이야기하고 행하지만, 그걸 '선언'하며 누군가를 나와 가르는 것에는 주춤거려진다.

 책방에 공간이 지향하는 가치를 적어서 걸자는 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그것이 환영보다는 검열과 필터처럼 여겨질 수 있다고 말하며 반대했다. 책방이 가능성에 대한 실험, 모든 사람의 맥락에 귀기울이는 곳이라는 개념으로 '존중'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젠더갈등'에 대한 위근우와 김희철의 sns설전을 지켜보자니 말이 가진 힘은 분명 '구분'이 크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너와 다른 나'를 정의내리는 그 힘은, 우릴 구원한 다음엔 외로움을 가져온다.

 그래서 언어로 날 알아간 이후엔 언어가 구분이 아니라 '연결'의 힘이 되도록 애쓰고 싶다. '그래야만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되어온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엄마와 딸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를 아프게하는 관계들도 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놓아주지 않는 관계. 책방에서 서가별로 일주일에 한 번 책을 추천하여 sns에 올리고 있는데, 나는 ‘엄마와 딸’이라는 주제 안에서 책을 추천하고 있다. 찾아보니 딸이 엄마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 책들이 얼마나 많던지...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항상 도돌이표처럼 돌아오게 되는 엄마와의 관계때문에 힘들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하니 위안이 되었다. 정희진은 가부장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엄마와 딸의 연대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페미니즘 운동이라면, 엄마를 다시 바라보고 나를 이해하고 내 안의 엄마와 화해하는 것이겠다. 그런 모임을 만들어보고 싶다. 기획해 봐야겠다. 



#에니어그램

 심리학에서 제시하는 성격구분들이 '지금의 나', 또는 '어떠한 사람 앞에서의 나'와 같이 나의 일부분에 대한 설명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허해지기도했다. ‘지금의 내’가 바깥 자극에 대한 반영이지 본질은 아니라면 ‘진짜 나’는 누구인가, ‘진짜 나’라는 것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럴 때 알게 된 것이 에니어그램이었다. bc 2500년경 시작되었고 신비주의 종교 안에서 은밀히 구전되어 온 것으로 여겨지는 이 성격 유형 설명이 나에게 의미있게 다가온건 성격을 본질로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니어그램에서는 성격을 우리의 어린시절 경험으로 우리가 작동시킨 삶의 패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한 동앗줄이었다고 이야기한다. 그걸 알아채고 벗어나기 시작하면 본질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에니어그램에서는 9가지  유형으로 성격을 나누는데, 하나의 유형이 다른 유형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나를 설명할 때 한 유형으로만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결또한 에니어그램에 관심이 가고 궁금해지는 이유이다. 

 

 간단히 에니어그램 유형검사를 했을 때 나는 8번 유형으로 나왔는데 한참동안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남을 통제하려는 유형'이라니, 맞다 아니다를 떠나서 '싫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난 스스로를 원칙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인 1번 유형에 가깝게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일상학자 연구일지를 적으며 계속 ‘권위’라는 키워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결국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권력지향형인 8번이 맞다. 

 

8번,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아..네...맞네요. ㅜ.ㅠ

 이렇게 되니 내가 왜 페미니즘 원형에 몰두하는지 그 배경과 이유가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힘에 대해 민감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페미니즘이 모두에게 유의미한 가치이지 않은지도 이해가 된다. 페미니즘은 스스로의 권위를 찾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나에게 유의미한 가치정의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스스로의 본질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가게 되는가?

 최근 읽기 시작한 ‘남과 여’에서는 두발 원시인이 된 이후 인류에게 남, 녀의 역할은 구분되었으며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이야기한다. 여성들의 경험에 대해 페미니즘이 가치를 둘 때 과연 그 경험이 어디까지를 이야기하는지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다. 마거릿 미드는 남녀역할 구분이 사회적인 발명품이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성별에 따른 ‘공통된 경험’이 지니는 힘을 다시 이야기하기도 했다. ‘남과 여’에서도 마거릿 미드의 이 말에 집중한다. 공통된 경험은 원형과도 닿아있고, 이것은 융이 아니마, 아니무스를 가르며 굳이 내면의 여성성, 남성성을 나눈 것과도 연결이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분석심리학자들이 비판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인데, 표면적인 구분 아래로 깊이 들어가게 되면 결국 구분이 가져올까봐 두려워한 차별과 억압은 의미없어 지지 않을까. 

 칼 융의 분석심리학은 에니어그램이 과학적인 성격이론으로 발전하는데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 천천히 이어가보자. 조급해하지 말고.



#모호함을 끌어안는 용기

 나는 어쩌면 ‘명확함’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구분’이 주는 선명함이 너무 좋아서, 이제까지 그렇게 나를 명확하게 구분지어 정의내려 본 적이 없기에 페미니즘이 나에게 준 선물같은 언어가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건 여전히 그렇다. 내가 ‘페미니즘의 원형’에 대해 연구하자고 다짐했을 때 기대했던 바도 그런 연장선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페미니즘의 원형이라는 것은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무엇과의 연결, 또는 유기적인 관계 안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자신이 그런 것처럼. 

 

 자유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에 닿게 된다. 난 그게 아직도 너무 신비롭다. 자유가 구분이라면 사랑은 연결이고, 구분 뒤에는 연결이 필연처럼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작년에 알아챈 건 나에게 사랑은 ‘위기’라는 사실이었다. 내가 확장된다기보다는 내가 흩어지고 무너진다는 느낌. 하지만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 나를 성장시킬 위기라는 것도 알겠다. 

 ‘현재를 살아라’, ‘순간에 머물러라’, ‘매순간 감사하라’같은 말들로 영적 구루들이 전하려고했던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 말들의 좋은 점을 이해하면서도 내 삶에서 튕겨져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도 알겠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전에는 그 무엇도 내 것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나의 언어를 갖는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 안다. 

본질로 이르는 길을 찾는다. 

하나의 지도는 없으며 그 길로 이끄는 힘만이 존재한다. 

그 모호함을 받아들인다. 힘들게.

 

아마도 이러한 여정이 될까. 이 연구의 결과를 언어화할 수 있을지 갑자기 자신이 없어진다. 이 또한 거쳐야하는 과정이겠지.

 

* 생활인들의 공부 프로젝트 모임, [일상학자]는 각자 지금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 '학자'가 되어서 공부를 계획하고 과정을 함께 나누며 최종발표회로 연구결과를 공개하는 1년 과정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1~2번 만나 각자의 공부 과정을 공유하고 검토하며 그 결과를 '냇물아 흘러흘러'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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