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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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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공부 프로젝트, 일상학자

첫번째 - 일상학자 연구+일상 공유서

고래의노래 2020. 3. 4. 23:09

#일상
둘째의 입학식은 한 달이나 미뤄졌고, 첫째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 1학년 학부모로서 내 시간이 없을 꺼라는 건 미리예상하고 있었던 바이지만, 24시간 전일 돌봄의 상황까지 고려했던 것은 아니었다. ㅠ.ㅜ 작게나마 계획했던 나의 시간들은 정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아무 것도 예측할 수도 계획할 수도 없고 그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정의 내리기
대화와 소통의 기본이 그러하듯 연구의 첫 시작도 용어의 정의내리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의 연구는 더 그러한 것 같다. '페미니즘의 원형을 찾아서'라고 할 때면 당연 이런 질문부터 생길 것이다. '페미니즘이 뭔데?' 그런데 이 질문을 속으로 곰곰히 곱씹다보면 피로감이 몰려든다. 아마도 이 세상에 페미니즘보다 더 많은 정의를 가진 단어가 있다면 그건 '사랑' 뿐이지 않을까. 여기에 나만의 정의를 얹는다는 것만으로도 '아..그만하면 됐거든!' 누가 이럴 것 같다. (아무도 안그러면 내가..-_-;;;) 돌봄과 배려, 존중과 연결되는 페미니즘의 정의내리기, 피곤하지만 해봐야지. 그래야 시작된다.

 

#칼 융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읽었다. 오래 전부터 사두었던 책인데, 진도가 나가지 않아 계속 못 읽고 있다가 몇 주동안 폭풍 진도로 읽어 나갔다. 내가 준비되어야 들어온다. 책도, 사람도...모든 것이 그렇게 '인연'인 것 같다. 나는 어떤 책이 마음에 들면 저자를 파고 들어간다. 그 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가 나에겐 무척이나 중요하다. 즉, 글과 그 사람이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지에 따라(이 판단은 사실 상당히 주관적이긴 하지만) 글이 아무리 좋았어도 다시는 그 저자의 책을 쳐다보지 않기도 한다. 곰브리치와 칼 세이건, 에리히 프롬 등이 나에게 그런 '찐' 지식인들인데, 여기에 융도 포함될 것 같다. 융의 분석심리학 이론들은 첫 눈에도 너무 내 마음에 들어왔지만 융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자서전에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놀라웠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환상에 이끌렸는데 이것에 강렬하게 저항하다가 마침내 받아들이고 그 경험으로 '신의 은총'을 느낀다.

 

"나는 지옥의 불길 속으로 즉시 뛰어들려고 하는 것처럼 용기를 끌어모아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나는 내 앞에 대성당과 푸른 하늘이 있는 것을 보았다. 하느님은 세상 저 위 놓은 곳에서 황금보좌에 앉아 있고, 보좌 및으로부터 거대한 똥덩어리 하나가 화려하게 채색된 새 지붕에 떨어져 지붕을 산산조각내고 대성당의 벽들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나는 엄청난 안도감과 말할 수 없는 해방감을 느꼈다. 저주를 예상했는데 그 대신 은총이 나에게 임하고, 그와 동시에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이 임했다. 나는 행복감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내가 하느님의 가차없는 준엄함에 쓰러져 복종하자 하느님의 지혜와 선이 나에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내가 계시를 체험한 것과도 같았다."

 

그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온 깨달음들을 밖으로 전하는 걸 신으로부터의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공감받지 못할 그 깨달음때문에 삶 내내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프로이트도 비슷한 시기 처음에는 공감받지 못하고 심지어 배척당한 생각들을 주장하며 외로움을 견뎠지만, 프로이트와 융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 '소명의식'이 아닌가 싶다. 그의 자서전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정리해봐야겠다. 내 연구 주제와 연관이 없어보이면서도 결국 연결되는 지점들이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며 '바흐오펜'이라는 사람도 알게 되었다. 융과 거의 동시대인으로 '모권시대'가 존재했음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라고 한다. 바흐오펜의 '모권'을 구매하고 검색하다가 십여년 전에 한창 빠져 있었던 에리히 프롬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이 바흐오펜의 모권 개념을 그 시대의 여러 사상과의 연관성 속에서 비교, 분류하며 남성과 여성의 권력투쟁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 쓴 책도 발견했다. 놀라운 연결이다!!

 

#발도르프
[동화의 지혜]를 읽고 있다. 발도르프는 내 안의 풀리지 않는 매듭같은 느낌이었다. 발도르프 교육 공동체 안에 있고 그 교육철학에 공감하는 면이 많지만 불편한 지점도 많다. 하지만 깊게 들어갈수록 '페미니즘의 원형'이라고 내가 느끼고 있는 개념과 발도르프 철학이 닿아있다고 느낀다. [동화의 지혜] 책에서 그러한 점들이 좀 더 느껴진다. 분석심리학적 옛이야기 분석과 다른 듯 같은 면이 있다. 이 점을 잘 비교해보아야겠다.

 

#글
요즈음 글을 쓰는 게 점점 조심스러워진다. 나에게 지금 글은 '칼'처럼 느껴진다. 내가 모호하고 분열적인 상황일 때는, 글이 칼처럼 나와 너를 구분하고 명확히 하는게 내 자신이 정의되는 듯 해서 좋았는데 지금은 그 구분을 넘어 연결되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다보니 글이 오히려 독으로 느껴질 때가 많아졌다. 혐오의 누군가에게도 그 나름의 맥락이 있다는 것에 이제야 마음이 열리는 것 같다. 여성혐오의 컨텐츠로 꽉꽉 채워져있다 여겨져 불편했던 성경읽기가 조금 편안해진 것도 그 연결선상에 있는 것 같다. 그래도 글로 소통할 일이 점점 늘어간다. 이 또한 과정이리라.

 

#다시 일상
칼 융 자서전에서도,  분석심리학 책들에서도, [동화의 지혜]에서도 [파우스트]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마침 지금 읽고 있는 중이어서 잘 참고하면서 따라가보려 한다. 이제까지 인류를 통틀어 아인슈타인을 제치고 가장 머리가 좋은 천재로 뽑혔다는 괴테.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걸까. 그는 [파우스트]의 마지막 부분을 쓰고서 그 시대에 이해되지 못할 것을 미리 예감하고 서랍 속 깊숙히 봉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칼 융이 느낀 '알지만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움'을 그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그 '외로움들'에 가 닿을 수 있을까? 꼭 그러고 싶다.
분명 일상이 흔들려 힘들긴하지만 변화는 이러한 멈춤과 어느 정도의 고통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지 깨달으면서도 작게, 욕구를 줄이며 살아가는 기회를 받게 된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가장 취약해지는지, 그건 어떻게 서로 품으며 함께 가야하는지 모두가 배워가고 있는 듯 하다. 삐걱거리던 세상에게 주어진 기회일까.
지금의 이런 상황도 동화 속 주인공들이 그랬듯, 파우스트가 그랬듯 인류가 겪고 통합해나가야할 고비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지금 휘청거리는 나의 이 일상도 '통합의 여정' 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나의 일상이 누군가의 묵묵한 일상으로 가능했음을 뼈져리게 느끼는 요즈음.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일상이 가능하게 하는 톱니일테지.
자연은 열심히 봄을 준비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의 톱니를 성실히 굴려보자.

 

* 생활인들의 공부 프로젝트 모임, [일상학자]는 각자 지금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 '학자'가 되어서 공부를 계획하고 과정을 함께 나누며 최종발표회로 연구결과를 공개하는 1년 과정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1~2번 만나 각자의 공부 과정을 공유하고 검토하며 그 결과를 '냇물아 흘러흘러'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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