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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 일상학자 연구+일상 공유서 : 페미니즘과 권위 본문

여성들의 함께 공부하기/공부 프로젝트, 일상학자

두번째 - 일상학자 연구+일상 공유서 : 페미니즘과 권위

고래의노래 2020. 3. 18. 19:55

2주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심심해하는 하루가 나에게는 오히려 빨리 흐르는 느낌이다. 아침 먹고 첫째 숙제 봐주고, 점심 준비해서 먹고 심심해하는 아이들 위해 함께 베이킹을 하거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내면 어느 새 다시 밥먹을 시간. 저녁 먹고 씻고 아이들이 자고 나면 그제야 내 시간이다. 이번 2주간은 책방 오픈 준비로 다른 것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읽은 책들도 모두 책방 오픈과 관련된 것이었다. '페미니즘의 원형을 찾아서'라는 연구를 위한 활동은 페미니즘을 정의내리며 이를 원형과 이어가는 작업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내 안에서 모든 경험들이 연결되어 확장되는 걸 느낀다.

 

#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이미 읽었던 책들을 들추어 각 저자들이 페미니즘을 정의내린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페미니즘이란 역사에서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공통 경험이 구속적으로 남성에 종속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
인권이나 평등 개념이 보편적으로 확장되지 않는 한 여성운동은 독립적인 운동으로 전개해야 한다.
페미니즘은 남성. 여성 모두의 온전한 삶을 추구한다.
페미니스트는 성별에 관계없이 한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 사이의 사회, 경제, 정치, 종교적 정의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
기독교 페미니즘 :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며 따라서 존엄성을 지닌다"는 것에서부터 시작.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 저항이라기 보다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과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 세상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바로잡는 것이라기 보다는 남성, 여성 모두 자신의 의식과 행동을 사회적 관계 안에서 인식하고 정치화하도록 돕는 것.
여성운동은 여성이 공적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넘어 남성이 사적영역으로 들어오는 것.
페미니즘 혁명 안에서 여자로서, 남자로서 완전한 자기실현이 가능하고 자유와 정의를 향한 꿈을 실현할 수 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
1) 1세대 페미니즘 : 남성과 같은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페미니즘. 프랑스혁명(1789) ~ 1920년경
미국독립혁명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본격화. 메리울스턴 크래프트 <여성의 권리옹호> 1792
2) 2세대 페미니즘 : 분열하는 페미니즘. 1960년대 이후
계급, 인종, 출신에 따라 다른 상황과 욕구가 페미니즘을 다차원적인 상황으로 변모시킴.
3) 3세대 페미니즘 : 모호성, 여성들 내부의 차이에 주목하기 시작.

페미니즘은 예측가능하고 관습적 일상에서 벗어나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1) 자유주의 페미니즘 : '여성의 권리'에 주목. 교육기회와 참정권의 확보가 주요한 목표.
2) 우머니스트의 등장 : 중산 엘리트 백인 여성의 경험만을 보편화하고 다른 계급의 여성은 배제되는 자유주의 페미니즘에 반발하며 등장한 흑인 페미니스트. 살고 살리는 상호 동반자 관계를 실천하며 페미니즘에 창조적 전략을 부여.
3) 레디컬 페미니즘 : '여성의 정체성'에 집중.
- 성차 없애기 : 성구별 자체를 제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
- 성차 발현하기 : 성차를 통해서 본래적 여성성으로 세상을 구원하자,
- 본질적 성차는 없다 : 매 순간 매 상황 속의 수행적 정체성만 존재.
- 테크노 페미니즘 : 모든 존재는 탈경계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과학기술이 우열구분을 붕괴시킬 것.

페미니즘 : 여성이 배제되고 박탈되었던 경험으로 배제와 박탈을 경험한 다른 이들과 연대하며 문명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는 사상과 실천.

 

**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억압의 틀을 깨고 본래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그 과정에서 모호한 정체성의 혼돈을 견디면서 온전함과 자기실현으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여러 저자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를 읽으면서 내가 찾은 교집합이다. 결국 페미니즘은 자기자신이고자 하는 회귀본능이다. 이것은 칼 융이 이야기했듯 무의식의 에너지가 자기실현으로의 길을 충동질하는 것과 같다.
 페미니즘은 나를 뒤흔뒤는 권위를 거부하면서 스스로의 권위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나는 나를 조금이라도 좌지우지 하려는 힘이 느껴지면 강하게 거부감이 든다. 그게 비록 옳은 방향이라도 말이다. 이번 2주간은 그 저항감으로부터 나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 빨강머리 앤 만화 vs 드라마
 심심해하는 아이들에게 빨강머리 앤 만화영화 DVD를 보여주고 있다. 하루에 2편씩 본다. 모든 것은 지금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것을 통해 나에게 다가온다. 10년만에 [빨간머리 앤]을 다시 보니 이전에는 지나쳤던 다른 것들이 보인다. 앤의 입장에서라기보다 마릴라와 매튜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되고, 19세기 말 ~ 20세기 초의 시대적 상황이 한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앤의 성장에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많은 어른들이 함께 하는데, 스테이시 선생님은 마릴라와 매튜에 버금간다. 첫 여교사의 등장에 에이본리 마을이 긴장하는 가운데 이 선생님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당찬 행보를 이어간다. 학생 한명 한명의 장점을 찾아 이끌고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해나갈 수 있도록 지도한다. 내면의 성장을 일깨우는 건 목사사모님인 앨런부인의 몫도 크다. 그는 교리수업에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허락하고 생각을 말하도록해서 앤이 영성으로의 길(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 기쁜 일이라는 걸 처음 느끼게 한다.
 아직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권위를 깨는 신여성들의 등장과 지지는 앤에게 자신의 미래를 큰 가능성 안에서 바라보게 한다. 스테이시 선생님이 내주신 '나의 미래는'이라는 작문 숙제를 생각하며 앞으로의 자신에 대해 그려보는 앤의 빛나는 얼굴을 보니 어찌나 흐뭇하던지. [작은아씨들]이나 [제인에어]같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여성작가들의 문학작품에 관심이 생긴다.

스테이시 선생님과 앤

 빨강머리 앤 만화를 보고 있다고 하자, 여러 지인들이 넷플릭스의 빨강머리 앤 드라마를 추천해주었다. 그런데 겨우 몇 편 보다가 포기했다. 약간 거부감이 들었다. 드라마에는 빨강머리 앤의 어두운 과거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사회의 차별적 분위기를 드러내놓고 줄거리에 풀어놓았다. 커다란 줄기만 남기고 다 각색을 한 것이다. 다분히 교육적이었다. 나는 두 번 생각할 것없이 페미니스트이다. 하지만 그 가치를 가르치려하는 것에는 거부감이 든다. 이 감정이 뭘까 곰곰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 책방 입고 리스트
 6명이 함께 운영하게 될 책방. 각 책방지기의 서가를 따로 마련하여 각자 테마를 잡아서 큐레이팅을 하기로 했다. 읽었던 책들 중 내가 추천하고픈 책, 책방에서 앞으로 사람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들을 리스트업 했다. 그 중 다른 책방지기들의 서가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많은 인문 서적들을 빼고, 에세이, 소설 등의 문학류를 많이 추가했다. 빨강머리 앤을 보고 관심이 생긴 근대초입 여성작가들의 문학도!
 나는 소설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라 완성된 리스트를 보니 신기했다. 그런데 결국 나는 여성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했는데, 그 맥락에 책리스트들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의 맥락, 이야기, 그 다양성에서 오는 존중. 그게 나에게는 중요하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올바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태도이다. 나는 일방향의 가르침보다는 함께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야만 성장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 성경 [탈출기] 속 이트로의 권위
 [여성의 눈으로 성경읽기] 모임에서 내 읽는 속도가 가장 느리다. ^^;; 오래 전에 시작한 모임인데, 난 이제야 탈출기를 읽었다. 성경 탈출기(출애굽기)에는 이트로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는 모세의 장인으로, 진정한 어른의 모습으로 모세의 성장을 돕는다. 그는 모세의 내면을 바라볼 줄 알았고,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세의 선택을 존중했으며, 그가 해낸 일들에 누구보다 기뻐했다. 그리고 모세를 위해 올바른 조언을 한 후에는 초연히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진정한 어른이란 이런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믿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축복하며, 때가 되면 적절한 조언을 하는 것. 강요하는 권위가 아니라 따르고 싶게 만드는 권위. 내 아이들에게 그런 권위를 가진 어른이 되고 싶다.

 

# 해방과 자유, 스스로 권위를 갖는다는 두려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은 히브리인들을 불안하게 한다. 고난과 억압이라는 일상으로부터의 분리가 그들을 막막하게 하는 것이다. 나를 정의내리던 틀을 벗어나자 나를 스스로 정의내려야 하는 과제가 주어진다. 고달픈 자유다. 히브리인들은 해방의 여정에서 고난이 올 때마다 모세를 탓한다. 탈출기는 인간이 스스로를 믿어가는 과정에 대한, 그렇게 틀을 깬 해방을 넘어 자유로 가는 과정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방이후에는 자유로의 재탄생이 이루어진다. 히브리 사회는 서서히 조직된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한다. 페미니즘이 나아가는 방향과도 이와 일치한다. 페미니즘의 초기 의미는 '여성해방'이었고 제도적, 사회적, 사상적 해방 과정 속에서 여성들은 스스로를 정의내리고자 언어의 힘을 기르고 있다.

 탈출기에는 '여성의 창조력'에 대한 상징적인 은유들이 가득하지만 율법 부분에 이르면 삐그덕거리기 시작해서, 하느님과 연결되는 제의 부분에서는 여성 혐오의 냄새를 풍긴다.


"출산, 생리, 성행위, 시체를 살피는 것과 같은 제의적 부정을 몰고 오는 행위나 상태는 모두 삶과 죽음의 관계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의 본질은 바로 신적 힘이다. 이것은 성스러운 것과 접촉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제의적 정결 체계는 인간적 통제와 신적 통제의 영역 사이를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_<여성을 위한 성서주석>

 

 인류 문명 초기의 신성은 양성적이거나 오히려 여신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인 것 같다. 희생제물의 피는 신성하게 여기면서 월경혈을 부정하게 바라보는 것은 분명 어떤 '구분'에서 온 것이다. 지금도 부탄에서는 월경하는 여자를 불결한 헛간에 가두는 악습이 있다. 헛간에서 여성들은 감염으로 죽거나 성폭행의 위협에 시달린다. 생명창조와 연결된 월경 현상과 생명, 희열과 연결되는 성관계는 분명 신의 영역에 포함된 일들이다. 이는 신성하게 다뤄져야 했고 오히려 경배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한 구분이 가부장제의 등장과 함께 터부시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 파우스트 - 그레트헨
 생명 창조 행위에 대한 터부시는 여성들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졌다. 이번에 읽은 파우스트 1권의 마지막에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죽이고 처형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파우스트와의 사랑을 나누었던 날, 그레트헨은 같이 사는 엄마에게 수면제를 먹였고, 이 부작용으로 엄마가 죽는다. 여동생의 명예를 위해 파우스트에게 덤비던 그레트헨의 오빠는 파우스트에게 죽임을 당한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은 처녀의 성관계가 죄악시되던 시대에 아기를 낳고 패닉에 빠진 그레트헨은 아이를 죽인다. 이 모든 상황은 그레트헨을 미쳐버리게 만든다. 원래 이 죄값은 산 채로 매장되거나, 자루에 넣어져 수장되는 것이었으나 그나마 괴테의 시대에 그나마 '인도적'으로 방법이 변하여 단순 처형이 되었다고 한다.
감옥에서 그레트헨은 아래같은 노래를 부른다.


"나를 죽인 창녀, 내 어머니!
나를 먹은 악당 내 아버지!
내 어린 여동생은 떨쳐 일어났다네.
서늘한 곳에서 난 어여쁜 들새가 되었네.
날아가거라! 어서!"


 이것은 '노간주나무' 동화에 나오는 노래이다. 실제로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이 노래를 배워와서 들려준 적이 있는데 노래 내용 듣고 화들짝 놀랐었다. ^^;;;<동화의 지혜>에서는 이 이야기를 자아를 죽이고 다시 부활하는 상징으로 해석했다. 물론 그레트헨은이 감옥에서 저 가사의 표면적인 의미를 자신의 상황과 연결하여 노래를 부른 것이겠지만, 괴테는 끝에서 '노간주나무' 이야기의 상징성과 연결짓는다.
 메피스토텔레스가 "그녀, 심판받았노라!"라고 말할 때 높은 곳에서 한 목소리가 들린다. "구원받았노라!"
괴테는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닫고 괴로워했음이 분명하다.

 

 

** '가르치려는 권위'에 대한 거부감이 큰 만큼 내가 연구하고 있는 것을 발표하고 전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서도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개념예술가인 박혜수 작가가 연구결과를 전시했던 것처럼, 그렇게 내 경험과 생각을 나누고 '당신의 생각'도 들어보는 자리였으면 한다.
그런데 다른 의미로는 권위에의 저항이 이렇게 큰 것은 아직도 내가 중심이 단단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건 권위를 갖고 싶은 욕망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저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페미니즘은 저항이 아니라 협상의 수단이고 다른 이를 향한 교정의 수단이기보다는 스스로를 인식해서 바로 서게 하는 가치관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나는 자유보다는 해방의 과정인건가 싶다. 지금의 나를 알고, 본래의 나로 돌아가게 하는 것. 그 힘을 찾아가자.

 다음 주에는 <남과 여>를 읽는 것을 목표로 정해본다.

 

* 생활인들의 공부 프로젝트 모임, [일상학자]는 각자 지금 집중하고 있는 주제의 '학자'가 되어서 공부를 계획하고 과정을 함께 나누며 최종발표회로 연구결과를 공개하는 1년 과정의 모임입니다. 한 달에 1~2번 만나 각자의 공부 과정을 공유하고 검토하며 그 결과를 '냇물아 흘러흘러'에서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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