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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모임> 두려움이라는 긴장을 넘어 환대로 나아가기 본문

존중과 스며듦/존재를 향한 태도

<존재모임> 두려움이라는 긴장을 넘어 환대로 나아가기

고래의노래 2019. 4. 19. 19:53

 <존재를 향한 태도> 열번째 모임을 잘 마쳤습니다. 이번 모임에서 우리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5~6장을 함께 읽고 낯선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의 의미와 그런 '공적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나누었습니다.

 

 저자는 활력있는 공적인 삶은 민주주의의 열쇠라고 이야기하면서 공적영역을 통해서만이 정치와 자본의 권력으로부터 사적인 삶도 보호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공적인 삶은 무엇이고, 낯선 사람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걸까요? 우리 안에서도 이에 대한 기준은 달랐습니다. 내가 선택한 작은 모임들을 공적인 삶으로 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나의 개인적인 욕구보다 큰 의미를 향한 활동을 공적인 삶으로 여기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자는 공적인 삶을 낯선 사람들이 서로 자유롭게 섞이면서 사회적, 정치적 연합의 유대가 생겨나는 삶으로 정의내립니다. 이 모든 정의는 미묘하게 다르면서도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기존의 내가 확장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죠. 그것은 평소에 내가 하지 않던 선택을 해보는 것이기도 했고 나의 욕구를 넘어 더 큰 가치를 바라보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저자는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시민권력을 창출하려면 공적인 삶을 되살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환대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환대받는 공간은 자본주의 시대에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광장과 공원, 골목들은 쇼핑상업지구로 대체되어 왔으며 다양한 삶이 모여 다채롭게 반짝이던 곳들은 어느 새 입소문을 타고 카페골목이 되버리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무력감에 공감하면서도 커뮤니티와 비지니스, 이익과 공공성의 공생이 가능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습니다. 냇물에서 이루어지는 책모임들과 강연에서 다양한 생각들이 나눠지면서도 경제적인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우연이 아닌 선택적 의지로 만들어진 자발적 결사체는 공적인 삶을 향한 좋은 출발이기도 하면서 사생활의 확장으로 이어질 위험성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계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이상한 정상가족>과 <아픔이 길이 되려면> 두 책을 읽으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상태에서 공동체를 통해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삶에 대한 새로운 실험'이라기 보다 '내 삶을 긍정받는 위안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자각과 동시에 커다란 변화를 위한 불편함보다 개인적인 편안함에 안주하려는 건 아닌지 찜찜했지요. 이것은 공적인 삶이 사적인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 필요하지만, 공적인 삶으로 들어가는 데에도 안전함이 느껴져야 가능하다는 아이러니와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낯섬을 마주하는 용기는 이렇게 우리에겐 여전히 숙제로 다가왔습니다.

 

 

 위 이미지는 <우리 친구하자> 라는 그림책입니다.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간 아름이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합니다. 낯선 집, 낯선 아이들, 낯선 골목. 그 속에서 아름이는 움츠러듭니다. 그런데 매일 선물이 배달되기 시작하죠. 제비꽃, 민들레 그리고 아름이에게 보낸 것이 틀림없어 보이는 쪽지 편지! '우리 친구하자. 네가 와서 너무 기뻐'라는 편지 내용에 아름이는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4번째 선물로 종이인형이 배달되었을때 아름이는 재빨리 뛰어나가 드디어 수수께끼 배달꾼과 마주하게 됩니다. 떨리는 긴장 속에서 서로에게 가만가만 다가가는 아이들 모습이 너무 예뻐서 전 이 책을 볼 때마다 콧등이 시큰해지곤 하네요.

 

 우리는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속에서의 경험들을 나누었습니다. 외국에서의 배낭여행에서는 다른 이들과 교류할 기회가 있어도 주저했고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웃에게 먼저 내민 손이 무안해진 경험도 있고 반대로 막연한 두려움에 내가 무안을 주기도 했었지요. 하지만 아파트 안에서 느슨하고 활기찬 연대를 경험하기도 했고 때론 아이들을 통해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환대의 달인들입니다. 모르는 사이여도 쉽게 마음을 열고 함께 놀이를 시작하곤 합니다. 그 놀이터에서 뻘쭘함은 항상 어른들만의 몫입니다. ^^ 저자는 이제까지 우리가 계속 이야기해온 '느슨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담이 될만큼의 깊은 관여는 아니지만 돌봄 속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관계'가 일상적인 공적인 삶에서 일어날 수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해요.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합니다. 그건 아마도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존재로 환대받는 경험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학교와 종교공동체는 공적인 삶이 태동하는 매우 주요한 곳입니다. 그 두 곳의 공통점은 다양한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모인다는 것이며 나에 대한 이미지와 세계에 대한 이미지 그리고 내가 내 자아보다 더 큰 무엇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두 공동체에서 주로 겪은 것은 전문가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한 채 자신만의 생각이 허락되지 않고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만약 교실에서 과목 속의 큰 이야기가 내 삶의 작은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배우고 종교 경전의 구절을 우리의 경험들을 통해 이야기한다면, 또한 우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충분히 듣는 경험이 쌓인다면 어떨까요? 낯선 이와의 만남은 더이상 두려움이 아닌 환대와 연결의 경험이 될 것입니다.

 

 한 모임벗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나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진실된 모습을 만나고 싶은데 아직 그러지 못한다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누군가를 대면했을 때 우리가 강렬하게 경험하는 것은 상대의 존재보다도 상대를 통해 느껴지는 감정들이지요. 어린시절 우리가 자연스레 갖고 있던 환대의 본성은 집, 학교, 사회에서의 부정적인 경험들로 깎이고 빛이 바래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공적인(public)이라는 단어는 어른(pubes)이라는 라틴어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고대에 공적인 삶은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볼 준비가 된 어른들의 활동무대로 여겨졌다고 하네요. 어른으로의 성장을 내적인 면으로 바라본다면 그것은 낯선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진짜 나를 만나는' 긴장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 아닐까요. 때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짜 내 모습까지 인정하며 나를 알아가는 그 긴장의 경험들이 쌓여, 결국 상대를 사회학적으로 이해하고 연민으로 공감하는 것을 넘어 살아있는 영혼으로 환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긴 시간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하며 우리는 조금씩 스스로가 변화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드러내지 않았던 공동체의 갈등과 마주할 용기가 조금씩 생겼고 갈등상황에서 내가 이제까지 취했던 태도들을 자각하고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한 정답에 대한 욕구를 누르고 나만의 답을 찾아가면서 애매함을 견디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삶의 권위자로 바로 우리 자신을 되돌리는 작업이기도 하겠지요. 그 불편한 과정들을 함께 견디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마무리하며 <존재를 향한 태도> 모임도 마치게 됩니다. 3권의 책을 읽고 이야기하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우리가 새롭게 깨닫거나 결심하고 변화한 이야기들을 나누어 보아요.

 

낯선 긴장과 환대의 손길을 넘어 아름이와 수수께기 배달부는 이렇게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얼굴로 마음가득 흘러넘치는 기쁨이 느껴지네요. 저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 <존재를 향한 태도>는 '냇물아 흘러흘러'(https://band.us/@natmoola) 라는 대안문화공간에서 진행되는 11주간의 책읽기 모임입니다. '이상한 정상가족', '아픔이 길이 되려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읽고 모두가 존중받는 공동체를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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