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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새여자 북클럽] 나를 용납하는 도덕으로 : '침묵에서 말하기로' 모임후기 본문
8월 29일 새여자 북클럽 네번째 모임에서 '침묵에서 말하기로'를 읽고 이야기나누었다. 이 책이 준 놀라움이 너무 커서 머리 속에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충격 속에서 기존의 의식이 여기저기 조각나고 튀어올라 여러 키워드들이 혼란스럽게 부유하고 있다. 조각난 사유들이 가라앉아 언어로 재배열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듯 하다. 하지만 단정한 언어를 맞이하기까지 마냥 기다릴 수 만은 없다. 커다란 몇 개의 인식 조각들을 잡아채 자리를 잡아보면 전체 퍼즐의 모양이 더 잘 보이겠지. 그건 이 책이 여성들에게 힘주어 외치는 언어화의 작업, 그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침묵에서 말하기로’는 이제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인간의 내면성장의 방향에 여성의 경험이 빠져있음을 지적하고 도덕발달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 과정은 도덕과 내면의 성숙을 연결짓고, 관계지향을 도덕의 가치로 포용하며 임신중지를 여성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도덕적 딜레마로 바라보면서 이루어진다. 놀랍게도 그 일련의 단계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도덕’이다. ‘도덕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저자가 연구과정에서 여성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처음에 나는 ‘도덕’이라는 단어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를 떠올렸다. 사회화과정을 위한 아주 기초적인 규범으로만 도덕 개념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도덕은 성장하면서 다듬어지고 세워지는 내면의 행동기준으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덕목이다. 인간은 성장하며 도덕을 발달시키고, 되어야하는 인간존재로 나아간다. 이렇게 도덕과 인간성장을 연결지은 것 자체가 시작부터 새로운 관점이었다. (인지학에서 거듭 강조되었던 부분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느낌...)
도덕발달과 인간성장의 연결을 종교, 사회, 심리 등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초점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심리영역에서 도덕발달은 내면의 성장이고, 건강한 내면은 오랫동안 독립적인 자아를 의미해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오롯이 바로 서는 것이며 그것은 부모로부터의 정서적 독립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게 심리학계에서 독립과 자율성, 개인화를 목표로 하는 도덕발달론이 정립되자 관계와 연결, 책임을 지향하는 여성의 내면은 미성숙하게 취급되었다. 생각해보니 우리만 해도 관계 속의 역할로 나를 정의내리는 것을 유약하게 여겨왔었다는 걸 알게되었다. 모임 안에서 ‘나’의 이야기보다 ‘엄마로서의 나’와 아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질 때면 답답함이 몰려오기도 했는데 이는 여성의 관계지향적인 내면을 성장의 과도기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관계중심의 도덕을 지향하는 여성들이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일까? 저자는 여러 심리학 연구들의 결과를 토대로 남성과 여성의 도덕관과 세계관이 다른 관점을 지난다는 결론에 이른다. 남성은 타인과 나 사이의 도덕을 권리중심으로 보는 반면 여성은 책임 중심으로 바라보며, 남성은 자율성을 안전하게 느끼는 반면, 여성은 연결감을 통해 안전함을 느낀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콜버그가 도덕발달 연구에서 사용한 ‘하인츠 딜레마’(죽어가는 아내를 살릴 특효약을 두고 약사가 터무니없는 약값을 요구할 때 하인츠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까?)에서 남아와 여아는 전혀 다른 도덕관을 보여준다. 남아는 충돌하는 가치들 사이에서 무엇이 우선순위인지를 정하고 법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그것이 어떻게 해석될지를 생각한다면, 여아는 관련된 사람들의 마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고 사람들간의 관계 안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둔다.
이러한 차이는 길리건의 실험에서도 드러난다. 사람들이 함께 있는 여러 상황이 그려진 이미지 카드를 보고 그 이후의 장면을 상상하는 실험에서 남자들은 보통 친밀해 보이는 상황 뒤에 폭력적인 내용을 상상한 반면 여성들은 경쟁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이어 폭력적인 상황을 떠올렸다. 남성은 친밀성에서 거부나 기만으로 인한 위험이 발생한다고 여기지만, 여성은 관계를 뒤트는 경쟁적 상황에서의 성취를 더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다. 남성은 자율성을 안전하게 느끼지만 여성은 연결감을 통해 안전함을 느꼈다. 남성과 여성의 세계관 차이를 길리건은 시각적으로 도식화하여 설명하는데, 남성이 관계를 위계의 사다리로 여기고 맨 위를 가장 안전한 영역으로 여기는 반면 여성은 관계를 그물망으로 여기며 그물의 가장 안쪽을 안전하다고 여긴다. 이 두 세계를 포개어 놓으면, 남성에게 가장 안전한 위쪽이 여성에게는 그물의 가장자리여서 안전하지 않게 느껴지고 여성에게 가장 안전한 가운데가 남성에게는 가장 치열한 역동이 일어나는 위험한 영역이 된다. 남성과 여성의 세계관 차이를 시각화하여 그려보니 한눈에 그 안타까운 대립들이 이해가 되었다.
"여성이 관계를 중심으로 삶에 뿌리를 내리고, 상호 의존성을 중요시하며, 성취보다 돌봄에 우위를 두고, 경쟁적인 성공에 갈등을 느끼기 때문에 중년기에 그들이 위기에 봉착한다는 관찰은 여성 발달의 문제를 입증한다기보다는 사회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다."
어릴 때부터 시작된 도덕관의 차이는 청년기에 이르러 여성들에게 혼란을 야기시키는데, “청년기에서 성인기로의 입문은 권력을 가진 남성들의 경험이 심리적이고 역사적인 뿌리가 되는 세상에 입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성은 여성다움과 성인다움 사이에서 분열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게다가 여성은 근원적으로도 남성과 다른 차원의 자아성장을 이뤄갈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여성의 자기 정체성이 어머니로부터의 독립이 아니라 동일시에 기반하고 어머니와 딸 사이의 지속적인 관계 맥락 사이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중년기 이후에도 이 혼란은 이어진다. 임신과 출산으로 다시 강력한 관계망 안으로 삶이 들어갈 때 그것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여성의 다른 목소리에는 돌봄 윤리의 진실이 있고, 관계와 책임의 연대가 있으며, 연결의 실패에서 생기는 공격성의 기원이 있다."
물론 남성들에게도 위기가 찾아오는데, 사회적 지위와 업무로부터 자신의 효용성을 입증할 수 없게 되는 은퇴 이후와 다른 이의 돌봄에 의지하게 되는 노년에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과제를 받게 된다. 이는 결국 관계의 문제를 자아발달 안으로 통합시키는 문제이다. 이런 면에서 여성의 경험이 인간에 대한 이해에 통합될 때에 남성과 여성 모두의 내면 이해에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길리건은 관계와 연결을 도덕의 영역 안에 포함시킨다. 이것이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임신중지는 여성이 돌봄과 책임, 여성다움과 성인다움의 사이에서 도덕관의 가장 큰 분열을 야기하는 사건이다. 길리건은 임신중지를 고려하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그로부터 다시 일년이 지난 후 다시 인터뷰함으로서 이 사건 전후로 그들의 도덕적 사유가 어떻게 확장되고 수렴되었는지를 살폈다. 강석주 박사님의 ‘윤리적 생애사건으로서의 임신중지’ 논문에 인터뷰이로 참여한 적이 있었기에 시간과 공간을 넘어 같은 상황의 여성들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울컥했다.
“임신중지 결정은...‘해소할 수 없는 격차, 수면 아래 깊은 곳에서 살아가는 느낌, 피와 탄생과 죽음에 깊이 관여하는 기분’이라 칭하는 것을 소환하며 책임과 선택의 문제를 여성이 가지는 불안의 핵심으로 가져온다.”
나라는 존재 안에 권리와 책임, 연결과 자율성을 어떻게 통합할 수 있는지, 종교적, 사회적으로 죄라고 판단된 행위 뒤에서 어떻게 도덕적 인간존재로 남겨질 수 있는가의 문제는 임신중지를 기점으로 여성의 내면에서 폭발한다. 임신중지는 내 인생의 가장 어두웠던 시기, 지금까지 나라고 믿었던 자아와 주요시하던 가치가 갈가리 찢어져 분열하던 때였고, 그래서 새로운 내가 탄생한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분열을 ‘도덕’의 개념 안에서 바라보고 돌봄과 책임, 여성다움과 성인다움, 연결과 자율 사이의 문제로 바라보지는 못했었다. 그런데 그 모든 혼란을 ‘도덕’ 개념에서 바라보자 많은 것들이 한 그림으로 꿰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 안에 터진 세 번째 폭탄이었다. 마치 화산폭발처럼 마음의 균열을 타고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그가 당면한 위기는 자신의 목소리를 타인의 목소리와 분리하고, 자신의 경험과 자아의식을 대변할 언어를 찾는 과정을 중심으로 한다."
도덕은 내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이며 정체성과 도덕발달은 주요하게 연결되어 있다. 며칠간 계속 인간과 도덕 주제의 강연들을 들었다. '도덕의 발달은 인간의 발달'이고, 도덕은 '타인의 의지를 내 안에 살게하고, 나의 의지가 타인의 표상이 되는 과정'이며, '감각세계에 속하지 않은 것을 감각세계와 연결하는 다리'라는 이야기들이었다. 자유 속에서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키우는 것이 도덕이라는 정의가 인간이 바깥의 기준을 벗어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나와 타인, 권리와 책임 사이에서 나만의 진실을 세워가는 것이 도덕적 성장이라고 하는 이 책의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가장 시급한 안건 중 하나는 여성들의 성인기 삶에 대해 여성 자신의 언어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경험을 포괄하면 관계를 해석하는 관점의 구조가 새롭게 변화할 것이며...지식은 정신 대 형식의 일치라는 그리스인들의 이상에서 해방되어 인간관계를 통해 획득된다는 성서적 개념으로 바뀐다."
에릭슨, 프로이트 등 심리학의 거장들 또한 여성의 관계지향과 이타적 책임감을 인지하였지만 이를 도덕발달 개념 안에 통합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렇게 ‘공적으로 인증’받지 못한 여성의 내면은 오랫동안 부유하며 언어를 찾아헤맸던 것이다. 그 역할을 맡아준 캐럴 길리건의 업적에 감사하다.
공존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가치에 갇힌 채 내 경험을 꺼내놓을 수 있는 어떤 말도 찾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평생 가지고 가야할 나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의 경험을 언어화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내 경험이 왜 언어화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나의 상황이 전체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이 나는 물론이고 인류의 나아감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자 다른 층위의 언어를 찾아내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용기가 생긴다.
"나는 나를 용납하는 도덕을 만들꺼예요."
이 책을 관통하는 한 문장을 고르라면 이것이다. 절대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았던 돌봄과 책임의 가치는 여성들이 누구도 상처주지 않는 무결점의 도덕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도덕의 영역에 자기자신을 포함시키기 시작하면서 다른 차원의 도덕으로 넘어간다. ‘나를 용납하는 도덕’이라는 문구는 내 마음을 얼얼하게 울렸다. 내 경험을 직시하며 부딪치는 가치들을 있는 그대로 껴안고 견디는 시간들을 통해 자기성실성을 담은 도덕이 새롭게 떠오를 것이다. 그렇게 할 것이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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