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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움켜잡고 놓지않는, 냉혹한 사랑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__]하는 새 여자

나를 움켜잡고 놓지않는, 냉혹한 사랑

고래의노래 2023. 4. 30. 20:40

🎈여성 서사 이야기 기획단  '[ _ 하는 ]새 여자'의  [행간, 머물다] 모임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튼'을 2주간 함께 읽었습니다. 마지막날 함께 나눈 후기를 올립니다. 

 

"너희가 다른 누구보다 더 잘났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내 교실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잘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루시 바턴의 학창 시절에 헤일리 선생님은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며 루시 바턴을 조롱하던 아이에게 일침을 가한다. '모두가 같다.' 헤일리 선생님에겐 이것이 존중이고 사랑이었다. 나는 이런 어른을 만나보지 못했다. 선생님들은 항상 네 옆의 아이보다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 아이들보다 '잘 난' 아이였다. 선생님들은 대 놓고 나를 편애했고 아이들은 숙제를 안해 온 날이면 윤주애가 안 해왔길, 그래서 자신도 야단맞지 않길 바랐다. 

"나중에 나는 그 조각상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얻었던 순간은 그를 쳐다볼 때의 은밀함이 존재하는 순간들이었다는 걸 깨달았다....나 혼자였다고 해도 오로지 이 겁에 질린 채 굷어 죽어가는 아버지이자 남자인 그를 볼 목적 하나로 갔을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특별함은 내가 언제나 움켜쥐고자 했던 가치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쉬는 시간이면 나는 학교 건물 맨 위층으로 올라가곤 했다. 그 곳은 공간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넓은 곳이었는데, 여러가지 커다란 체육 도구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곳에 앉아 생각했다. '나는 여기 있어.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 몰라. 나만 아는 거야.' 사춘기가 되어 서태지에게 무지막지 하게 빠져들었을 때도 팬클럽에 들지 않았던 건, 다수 속의 하나가 된다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다르게 사랑한다. 그게 내가 붙잡고 있던 특별함이었다. 

"내가 원한 건 엄마가 내 삶에 대해 물어봐주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말하고 싶었다. 바보같이-정말 바보짓이었다-나는 불쑥 "엄마, 내가 단편 두 편을 발표했어요."하고 말해버렸다. 엄마는 마치 내가 발가락이 더 생겼다고 말한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흘깃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내 삶에 관심을 가져주길...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바란 것도 저것이었다. 학창 시절에 엄마는 나를 많이 칭찬했다. 그런데 어른이 된 후에는 달랐다. 내 상황에 자신이 필요한지 아닌지만이 관심사인 것 같았다. 요즈음 이런 모임을 시작했다고, '내 안의 여신찾기' 모임 기록지를 엄마에게 건넸을 때 엄마가 이 모임이 뭔지, 무얼 이야기하는지, 왜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물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건네받고 그만이었다. 돌아오는 질문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루시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지만, 그 감정을 혼자서만 간직한다. "사랑한다."고 소리내어 그 사람에게 말한 건 엄마뿐이었다. 사랑이 뭘까.

"세라 페인이 신의 마음처럼 활짝 열린 마음으로 빈 종이와 마주하는 것에 대해 말한 건 아마 그 다음날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신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 '냉혹'해진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 누구도 더 잘나지 않았다. 신 앞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죄와 벌이라는 공식이 있어도 신은 매번 기꺼이 자비를 베푼다. 구약성경 속 요다는 하느님의 이런 점을 못마땅해한다. 신약성경 속의 유다 또한 '사랑'이라는 나약함을 이야기하는 예수님에게 실망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희미해지고 사랑은 둘 간의 애착이 아니라 박애가 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건 이 박탈감을 견디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평등한 사랑은 냉혹하다.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리고 저 사람도, 저 사람도...다른 사람처럼 나도 사랑하신다.'
어제 길을 걸으며 되내어보았다. 기쁘기보다 서글프다. 아직 나는 나만을 사랑해주는 구원자를 원하고 있구나. 

수영 수업에서 수강생들은 두 레인으로 나뉘어 연습을 한다. 수영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벽쪽 레인이다. 나는 언제나 벽 쪽에 있다. 벽 쪽에는 강사님 말을 거의 듣지 않으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을 너무나 무서워하는 아가씨도 있다. 
강사님이 키판을 잡지 않고 연습해보라고 했는데, 이 아가씨는 구석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지난 번에 강습 안오셨었어요?" 혹시 방법을 모르나 싶어 물어보았다. "아니요. 무서워서요." 아가씨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 뒤로 난 그 아가씨를 애정하게 되었다. 연습할 때마다 많이 망설이고 속도도 늦는 그 아가씨는 언제나 나보고 먼저 가라고 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마주보고 미소짓는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해병대 일때 수영을 배우지 않았지만 바다를 건넜다고 하셨다. 강사님의 지시에 따르기보다 본인의 수영을 한다. 강사님은 "아~ 해병대 몇 기? 6기? 우리 아버지보다 아래시네."하며 할아버지에게 관심을 표하면서도 치솟는 자만심을 살포시 누른다. "같이 시작해도 각자 속도가 다를 수 있어요. 괜찮아요." 제각각의 속도대로 나아가는 수강생들을 모두 존중하며 한 방향으로 이끈다. 나는 강사님을 애정한다. 
할머니는 아예 물이 무서우시다며 그냥 걷기만 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강사님이 물에 얼굴을 넣어보게 여러 번 시도하셨지만 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커플이다. 할아버지에게 물을 튀기며 장난을 친다. 나는 할머니를 애정한다. 
낯선 이들을 애정하게 되는 건 그야말로 아직 낯설기 때문일 수 있다. 몰라서 특별하기도, 깊게 알아서 특별하기도,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저 사람에게도 엄마 아빠가 있다니...'
어렸을 때 베란다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하곤 했다. 모두에게 엄마. 아빠가 있고 가족이 있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모두가 특별하고 또 모두가 특별하지 않았다. 

"나는 진정한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 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나는 다른 이들처럼 아픔을 겪었다. 그건 나만의 아픔이고 그것이 지금 날 이렇게 이끌었다. 그건 특별하기도 하고, 또 특별하지 않기도 하지만 그 기억들을 난 존중한다. 그리고 다른 이의 기억도. 그게 나를 내가 냉혹하게 사랑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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