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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x여성] 재투성이(신데렐라)와 함께 하는 2주차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옛이야기와 여성

[옛이야기x여성] 재투성이(신데렐라)와 함께 하는 2주차

고래의노래 2021. 8. 17. 10:40

* [달빛오두막] 모임에서는 '어른을 위한 그림동화 심리읽기'를 함께 읽으며 옛이야기 속 여성과 여성들의 이야기, 이 둘을 연결해봅니다. 처음 만날 주인공은 재투성이(신데렐라)입니다. 재투성이와 함께 하며 모임벗들과 나누었던 후기들을 올립니다.

 

[고통 속에 얻는 자긍심] [악한 계모는 누구인가?]

저자는 이 챕터에서 놀라운 이야기를 던진다. 재투성이가 '고통스러운 경건함'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고수하기 위해 주어진 역할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재투성이가 단순히 상황의 피해자가 아니라 상황과 관계를 그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주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에서만 재투성이 심리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재투성이는 유년기 감정이 내부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자신이 이를 갈고 닦음으로써

과거 경험을 줄곧 재확인하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새어머니의 학대를 재투성이가 근원적 죄책감이라는 트라루마를 무의식적으로 연출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건...

처음으로 제 힘으로 설 수 있도록 돕고 어머니의 무거운 집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현실적 사건의 심리적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저자의 해석으로 보면 계모와 의붓언니의 태도는 재투성이의 심리 안에서 탄생한 역할일 수 있다. '친어머니의 죽음'은 잉여의 아이로 태어난 재투성이가 어머니의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내면에 만든 서사이며, 동생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와 언니들이 이룬 육아 동맹은 재투성이 내면에 계모와 의붓언니들의 횡포로 표현될 수 있다. 이제까지 알던 신데렐라 이야기와 달리 '아름다운' 의붓언니들과의 '아름다움' 투쟁은 '누가 사랑스러워져 사랑을 챙취할 수 있는가?'라는 테마라고 할 수 있다.

여기까지 이르니 상처를 만들지 않는 완전무결한 상황은 없다는 생각이 더 강렬해진다. 극단적인 가정상황이 아니라 여러 형제들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는 지극히 평범한 가정 상황이 재투성이 내면을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누구 하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조차 없다. 어머니도, 언니들도, 심지어 아버지까지. 이런 상황에서 '의붓언니' 역할을 한 언니들이라고 상처가 없을까. 동생의 탄생으로 어린시절이 단절되고 일찍 엄마의 육아 동반자가 되어야만 했던 그들의 속내는 또 어떨 것인가? 어린 시절은 한 번 내쳐진 손길 하나에도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어린이가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지 새삼 느껴지면서 서글프고 쓸쓸해졌다.


"아이에게 유익한 존재는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받으며 죽고

어쩔 수 없이 계모로 부활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스스로 살아갈 줄 아는 어머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은 부모는 참으로 단단하고 심지 굳은 존재여야 한다. 저자는 아주 선한 어머니가 계모가 되는 서사를 외부에 경제긋기를 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스스로 피로와 구속을 낳았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왜 아니겠는가 결혼한 여성에게 쏟아지는 의무들에 짓눌려 살던 그 시절 엄마들의 생이 떠올랐다.

다행인 것은 재투성이는 반복되는 노동을 통해 지혜를 획득해간다. '곡물골라내기' 과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성들의 서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과제인데, 이것이 '분별력의 습득'을 의미한다는 데는 의견이 하나로 모아진다. 거친 상황으로 내몰리고, 스스로 그 상황 안에 머물려 역할극을 하는 중에도 현실의 상황은 주인공을 단련시키고 가야할 방향으로 인도한다. 그게 얄궂은 삶의 여정이겠지.

[아버지는 왜 딸을 도와주지 않을까]

소제목은 '아버지'가 주어이지만 이 챕터의 내용은 재투성이 딸이 아버지에 대해 보이는 태도가 갖는 의미에 대해 탐색한다. 저자는 동화에서의 사건들은 주인공의 심경변화로 해석할 수 있다며 아버지가 여행을 떠나는 것을 아버지와의 결속방식이 바뀌는 것으로 바라본다. 그 변화의 의미는 성적인 긴장감이다. '말탄 아버지'가 '모자'에 걸리는 첫번째 '나뭇가지'를 가져오는 것은 소녀의 깨어나는 성이 지니는 소망을 상징하며 이제까지 느끼고 있던 존재적 죄책감에 성기적 성욕 체험에 대한 죄책감이 더해진다는 것이다.
억압된 성욕과 근친 관계에서의 성욕에서 오는 도덕적 긴장감은 프로이트 학파가 불안 심리의 근간으로 주장하고 있는 점이다. 기승전'성'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그 편협함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인간 심리의 핵심해석으로 여겨진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성적 긴장이라는 주제가 나왔을 때 한숨부터 나왔었는데, '자기 욕망에 밪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부정하여 위험을 제거'한다는 것이나 '남자의 성에 대한 불안은 재투성이에게는 분명 유년기의 유산'이라는 해석에서는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성적 희열이라는 것에 누구보다도 호기심이 많았으면서도 여성으로의 신체적 변화가 위험하게 느껴져서 불편했다.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 성범죄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혹시 내가 기억에서 지워버린 사건이 있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성에 대한 욕구와 성에 대한 불안이 내 안에서 극단으로 치달으며 대립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여기에 저자는 재투성이의 첫 소망에 대해서 다시 언급한다. 처음부터 재투성이가 원한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이가 회복되어 어머니의 죽음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한 욕구가 아버지가 가져온 개암나무를 어머니 무덤 앞에 심는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재투성이의 본질은 자신의 자아를 희생함으로써

부모의 갈등이 어느 정도 극복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살아도 좋음을 뜻한다."


밤마다 계속되던 엄마, 아빠의 싸움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나는 베개로 귀를 막고 얼른 잠이 들길 기도했었다. 웃음 소리가 넘치는 가정을 얼마나 바랐던지...지난 번 짧은 심리 면담에서 상담자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엄마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다고 했더니 이런 질문을 주셨다.
"그 당시 주애씨가 그 가정에서 맡았던 역할이 있었을 꺼예요. 생각해보세요. 나는 가정 안에서 어떤 존재였나요?"
그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밤 사이의 폭력 현상을 알지 못하는 걸로 여겨지는 순수한 존재...였네요. 그래서 이 가정이 유지되었었네요."
내가 말해놓고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대답이 이제야 마음에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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