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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혜게임 후기] 게임은 끝났지만 현실 이지혜들의 삶은 계속된다. 본문

여성들의 함께 말하기/이지혜 게임하기

[이지혜게임 후기] 게임은 끝났지만 현실 이지혜들의 삶은 계속된다.

고래의노래 2020. 2. 13. 17:45

2월 13일 목요일 오전, '냇물아 흘러흘러'에서 [이지혜 게임] 모임을 가졌습니다.
40대 여성 3명과 10대 남아 2명이 함께 1시간 반동안 이지혜의 인생 여정과 함께 했어요. 처음에는 플레이어의 숫자를 채우려고 2명의 남자친구들을 초대했거든요, ^^;; ㅎㅎ 그런데 결국 이 두 분의 참여로 게임이 훨씬 풍성하고 의미있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지혜 게임]은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의 페미니즘 버전입니다.

이지혜라는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의 탄생과 죽음까지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며 선택의 고비마다 조언을 해주어야 하지요. 플레이어들은 이지혜와 이지혜의 가족, 지인들로 역할을 나누게 되는데요, 각 지인들은 이지혜 내면의 사회성, 자존감, 감수성, 스트레스, 순응도를 반영합니다. 주인공인 이지혜 역할은 게임 카드에 적힌 갈등상황을 제시하고 지인 플레이어들은 서로 토론을 하며 4개의 답중 하나를 고릅니다. 고른 답에 따라 이지혜 내면의 스펙들은 올라갈 수도 낮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 계산은 이지혜 역할이 담당합니다. 스펙 중 하나라도 0이 되거나 스트레스가 100이 되면 이지혜는 사망합니다!

 

게임의 공동 목표는 '이지혜 살리기'입니다.

이 씁쓸하고도 현실적인 목표를 위해 플레이어들은 힘을 합쳐야합니다. 자신의 스펙만 챙기다 다른 스펙에 문제가 생겨서 이지혜가 죽는다면 그 게임의 공동실패로 마무리되지요. 이지혜가 살아남았다면 각 스펙의 점수를 계산해서 세부 승자가 정해집니다. 즉, 이지혜가 죽으면 모든 게 의미없어집니다!!

 

이지혜는 유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노년기를 거치면서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을 법한 일들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자신의 취향이나 포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되고 성추행과 외모품평에 시달리며 출산과 가사, 돌봄노동의 압박이 지속되지요. 선택의 기로 속에서 결정이 쉽지 않은 이유는 하나의 스펙을 위한 선택은 다른 스펙을 약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높이려 자기 주장을 강하게 펼칠 경우 사회성이 떨어지지요. 눈에는 눈! 식의 복수는 스트레스는 떨어뜨리지만 순응도 또한 낮춥니다. 반면 관계유지를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면 순응도는 올라가지만 감수성이 떨어집니다.

 

 

플레이어들을 함께 열띤 토론을 하며 이지혜의 선택을 결정해갔습니다.

사진으로도 느껴지시지요? 엄청 진지한 분위기! ㅎㅎ 살림님 미간에 주름이 잡혔네요. ㅋㅋㅋ 이미 이지혜의 갈등들을 삶으로 경험한 40대 여성 플레이어들에게 각 스펙들 사이의 미묘한 줄다리기는 매우 익숙했습니다. 개인적인 선호도야 분명했지만 어떤 경우를 선택해야 할지 이지저리 생각이 많아졌어요. 하지만 10대 플레이어들에게 답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순응 아니면 공격! ^^ 그건 경험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기도 했고 각자 맡은 역할이 반영하는 스펙을 대변하는('남자친구-순응도'와 '남동생-스트레스') 주장들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물론 각자의 기질을 나타내는 것이지도 했어요.

 

다양한 배경, 연령, 기질, 성별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쏟아내는 다채로운 의견들과 그 사이의 조율이 매우 흥미진진했습니다.

비슷한 경험 여부가 이지혜를 살리는데 특별히 강력한 변수는 아니었습니다. 이지혜가 각 상황 안에서 겪었을 감정상태에 대해 비슷한 유경험자들이 자신의 사례를 들어 설명을 해주는 등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문제는 '스펙 간의 조율'이었거든요. 너무 한 쪽의 스펙만 강화되는 답을 누군가 주장할 경우, 다른 상황에 대한 상상을 서로 제안해나가며 최선의 답을 찾기 위해 함께 노력했습니다.

 

게임을 하며 우리가 발견해간 것은 서글픈 현실과 함께 희망섞인 기대였습니다.

이지혜 게임의 가장 아픈 부분은 이지혜의 인생 경험 속 지인들이 '고정된 캐릭터'였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선택에 따라 변화한 상대와의 관계가 다음 상황에서는 반영되지 않습니다. 부모님과 남편에게 아무리 자기 주장을 펼쳐도 그들에게 씌워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바뀌지를 않습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그 이후의 전개가 달라지는 양상으로 게임이 전개되어 나간다면 좀 더 흥미로울 것 같았어요.

그런데 10대 친구들에게서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10대 플레이어들은 '미스코리아'가 뭔지 몰랐으며 '치마 들추기'같은 놀이는 해본 적도, 본 적도 없었습니다. 여성인 이지혜의 억울한 경험에 감정을 이입해서 분노하고 '아내' 이지혜가 남편과의 관계 안에서 겪는 불평등은 생소한 것이었죠. (각 가정의 상황이 짐작되네요! ^^) 실제로 이 게임은 10대 청소년들의 페미니즘 교육 시간에 많이 활용된다고 해요. 성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니 10대 중반 이후 청소년들과 함께 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지혜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날 우리의 게임 안에서 이지혜는 사망했습니다. ㅠ.ㅜ 스트레스가 100이 넘어버렸거든요. 의미심장했던 건 자존감도 100이 넘었다는 점이이었습니다. 억압에 순응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자신을 지키기위해 주장을 펼치는 것도 모두 스트레스였기 때문입니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상황에서 이지혜가 이지혜로 살아가려면 스트레스는 필수 상황인 것입니다.

 

게임은 끝났지만 현실 이지혜들의 삶은 또 계속됩니다.

게임이라는 고정된 규칙과 메카니즘 안에서 이지혜는 사망했지만 우리는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유기체의 삶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것은 고정된 듯 보여도 아주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를 만들고 있는 것도 우리입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의 아이들이지요. 4가지의 답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이것 저것을 섞고 나의 생각을 더하면 더 괜찮은 선택지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사실 그건 우리가 삶에서 매순간 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나의 성향, 나의 배경 그리고 나와 관계한 사람들의 기질까지 더해서 우리는 나만의 선택들을 해나갑니다. 우리 삶의 패는 여전히 우리에게 있습니다. 현실과 나 사이의 간극이 우리를 잡아먹지 않게, 섬세한 조율을 하며 인생이라는 게임을 해볼까요? 그렇게 살아갑시다!

 

* [이지혜 게임] 모임은 첫 시도 속에서 발견한 아쉬움을 보완하는 방법을 추가하여 다시 진행해볼 예정입니다. 이지혜 게임이 궁금하신 분들은 '냇물아 흘러흘러' 밴드 공지를 주시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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