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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삶, 나삶]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 시라는 도끼에 찍힌 마음들 본문

여성들의 함께 읽기/여성, 삶을 글로 쓰다

[글삶, 나삶]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 : 시라는 도끼에 찍힌 마음들

고래의노래 2019. 7. 24. 02:49

밸류가든의 여성주의 문화예술 아카데미 프로그램 중 '글로 만나는 여성의 삶, 나의 삶' 첫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글로 만나는 여성의 삶, 나의 삶'은 다양한 문학 장르 안에서 여성의 삶을 만나고 나를 비춰보는 여성주의 책모임입니다. 첫번째 시간에는 문정희 시인의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를 함께 읽고 이야기나누었습니다. 

문정희 시인은 고교생때 서정주 시인에게 발탁되어 등단한 이래 50여년이 넘는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류'시인 으로 구분되는 것을 싫어하지만 본질적 존재로서 '여성'시인인 것을 축복으로 여깁니다. 범주화된 여성으로 시인의 정체성이 조각나는 것은 거부하지만 야성적인 창조의 혼을 가진 여성이라는 존재로서 자신이 시인이라는 것에는 벅차게 기뻐합니다.

<내 몸 속의 새를 꺼내주세요>는 문정희 시의 커다란 주제 중 하나인 '여성'을 통과하는 시들을 모은 시집입니다. 시를 통해 그는 여성이 겪어내는 사회적 모순을 생생하게 드러냅니다. 그리고 여성괴 남성 모두 진짜 내면을 마주해야한다고 소리칩니다. 이것은 결국 여성주의 사회운동가들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으나 자신은 시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래서 문학성으로 변화를 이끌려 한다고 했지요.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당당한 선언인 셈입니다.

여성주의 시인으로 이야기되는 많은 시인들이 있지만 문정희 시가 가지는 특징들은 이런 명확한 '시인 정체성'과도 연결됩니다. 그의 시는 '날 것'의 느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쉽게 다가오지요. 실제로 문정희 시인은 좋은 시는 '막 읽어도 느낌이 오는 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50여년의 세월동안 여성들을 바라본 시선을 통해 여성의 삶은 어떻게 변했고 또 어떤 부분은 그대로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여성'을 중심으로
- 역할 안에서 억압된 여성의 삶
- 생명, 창조성의 원형으로서의 여성성
- 남자와의 관계, 남성성의 원형
- 내가 인식하는 나의 몸과 나이
- 주체적으로 느끼는 관능
- 역사 속에의 여성의 분노와 저항
이렇게 여러 주제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모든 글을 글쓴이의 삶의 여정을 드러냅니다. 문정희 시인의 시도 마찬가지이지요. 그가 '여성을 겪어내기' 시작한 것은 결혼 이후이며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에 눈 뜬 것은 30대 초반에 미국으로 2년간 유학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일찌감치 '천재소녀'라는 수식어 속에서 혜성처럼 등단했던 그에게 특별대우는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는 더이상 특별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영어에 서툰, 동양, 여자라는 마이너 집합체가 되버립니다. 그렇게 주변부의 삶을 깊숙히 경험하고 여성의 언어를 자각하면서 문정희 시인은 그의 말처럼 '피투성이인 목청'을 드러내며 시를 작업해왔습니다.

그는 억압받는 여성의 삶에 주목하며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들을 썼습니다. <작은 부엌의 노래>에서는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피를 삭히고
<퇴근시간>에서는 '저녁 현관문이 열리고 결혼이 들어오자, 신사임당이 어우동에게 시를 숨기고 나가 있으라 눈짓'합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생명의 원형으로서의 여성성과 삐뚤어져 안타까운 남성성에 대해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집이야기>에서 '태어날 때부터 여자들은 몸 안에 한 채의 궁전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이야기하고 <치마>에서는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시인은 자신의 자아를 억누르고 접힌 상태가 되기도 하지만, '잠 못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싶다가도 아차, 싶고'(<남편> 중에서)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부부> 중에서)사이인 그 남자가 애처롭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남자들이 내면의 힘을 찾아서 '비겁하게 치마 속으로 손을 들이미는 때 묻고 약아빠진 졸개들' 말고 '불꽃을 찾아 온 사막을 헤매는 진짜 멋지고 당당한' (<다시 남자를 위하여> 중에서)남자로 다시 살아나길 기도하지요. 그는 남성성의 원형질을 살려주는 것도 시의 역할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여성성, 남성성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탄식과 찬양이 일면 부담스럽고 '구분'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응원이고 어떤 면에서는 현실직시인 이러한 에너지들이 현재에도 유효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좌절스럽기도 했어요. '존재'가 존재 자체로만 당당히 서기가 어찌 그리 어려운 건지 답답하기도 했구요. 

사실 문정희 시인이 시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결국은 '존재'끼리의 대면일 것입니다. 그런 존재의 연결에 대한 시가 <응>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햇살 가득한 대낮 / 지금 나하고 하고 싶어? / 내가 물었을 때 / 꽃처럼 피어난 / 나의 문자 / "응" '
'땅 위에서 제일 평화롭고 / 뜨거운 대답 / "응" ' 
서로를 품고싶은 그 강렬한 열망에 대한 화답인 '응'이라는 한마디가 갖는 힘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대립이나 의존같은 나약함이 아니라 강렬한 두 힘이 주체적인 욕구로 마주하는 순간에 터지는 '연결과 통합의 에너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만남을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문학 장르 안에서 은유로 표현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은유들이 시를 바라보는 각자의 인식과 맞닿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시에서 삶의 다양성이 모두 존중되었으면 하는 마음을 읽고,
누군가는 나만의 이야기를 힘차게 밀고 나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읽었습니다.
연민 속에서 모두가 함께 흘러흘러 사는 삶도 보였고,
옛날의 여성이야기가 다시 반복되는 것에 힘겨우면서도 다른 미래를 꿈꿔보게도 되었지요.
여성, 남성을 넘어 존재로 있고 싶다는 욕구를 다시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

시인은 어려운 유학시기에 '하늘 아래 오직 네가 있다'는 스승 서정주 시인의 말이 되살아났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존재가 유일하기에 특별한, 존재 가치를 떠올렸던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잠든 내가 있고 그것을 깨워야 진정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찾게 되니, 문학이라는 도끼로 나를 깨우고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시라는 압축된 언어가 도끼가 되어 우리의 마음을 찍습니다. 앞으로 만나게 될 글들이 모두 그러하겠지요. 찍혀서 벌어진 마음의 안 쪽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어떤 '새'일까요. <내 몸 안의 새를 꺼내주세요>라는 시집 제목처럼 모임 안에서 우리 안의 새를 함께 찾고 꺼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모임에서 도끼로 찍혀진 마음들을 기꺼이 나눠주셔서 감사했습니다. 2주 뒤에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으로 다시 반갑게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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