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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여신찾기
[옛이야기 속 여성성의 재발견] 강연 후기 -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한 여정 본문
지난 10월 3일, 신화학 박사 고혜경 교수님을 모시고 '옛이야기 속 여성성의 재발견'이라는 온라인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강연은 책읽는 정원의 책모임 [달빛오두막]에서 밸류가든을 통해 서초구양성평등기금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보름달 아래 여성들의 이야기 모임인 [달빛오두막]에서는 '옛이야기와 여성'이라는 주제 아래 이제까지 서양의 옛이야기, 우리 옛이야기 그리고 신화 속 여성들의 여정을 따라가보았습니다. 옛이야기는 오랜 세월을 통과하며 인류의 지혜를 담아왔고, 영적 성장을 위한 과제를 제시하며 여성성과 남성성의 가치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젠더 구분의 경계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시대에 무의식적 에너지의 여성, 남성 구분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여성성이라는 단어로부터 느끼는 편향된 감정때문에 우리가 내면의 힘을 제대로 대면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책을 읽고 이야기하며 올라왔던 이러한 질문을 붙잡고 저자 강연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옛이야기 속에서 여성성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해오신 신화학 박사 고혜경 교수님과 함께 옛이야기의 인물과 상징들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해석을 알아보고 옛이야기가 21세기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를 들어보았습니다. 나 자신을 외면해왔던 현실을 자각하게 된 교수님 개인적 에피소드로 시작된 강연은 여성성, 남성성의 의미, 옛이야기에서 보이는 여성의 자기실현 여정, 시대의 과제와 나아갈 길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아래 강연 기록은 강연자의 시점에서 작성하였습니다.
1. 여성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미국 유학을 시작했던 서른 살 즈음 열심히 잘 산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모르게 헛헛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던 중 꿈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고 처음 들여다본 꿈에서 이런 공허한 느낌에 대한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난폭운전사의 차에서 내리는 나 자신을 보는 꿈이었는데, 내가 2명이었고 또 다른 나는 한복을 입은 전통 여인이었다. 그 꿈은 내가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해주었고 나 자신이 삶의 난폭운전사였음을 알려주었다. 세상의 가치를 따르며 살면서 내면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삶의 핸들을 스스로 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중 이에 대한 통찰을 주는 이야기가 있다. 추한 마녀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가로 기사 중 한 명과의 결혼을 요구했다. 기사들 중 최고의 기사가 자원해서 마녀와 결혼하게 되는데 첫날밤 마녀는 자신은 저주에 걸려 하루 중 반은 원래 모습인 미녀와 반은 추녀로 살게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면서 언제 미녀로 있길 원하냐고 묻는데 기사는 '당신이 선택하라'고 이야기한다. 마녀는 저주에서 풀려 계속 본래의 모습으로 있게 된다.
현대 사회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다. 특히 여성들에게 삶의 선택권이 자기자신에게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는다.
2. 진짜 여성들의 힘을 찾아서
가부장제가 편집한 이야기말고 진짜 여성들의 힘을 말해주는 이야기는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했다. 특히 제주도에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힘 장사 중 최고가 여성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우리가 듣고 자랐다면 여자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부장제 이전의 옛날 것, 옛이야기와 신화 그리고 역사 속 여신시대에 대한 공부를 통해 그런 것들을 발견해왔다. 인류 초창기 신들은 다 여신이었다. 몰타, 크레타, 터키 지역을 가보면 이러한 신전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대는 서로를 도우며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대였다. 인류는 원래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게 아니다.
3. 용어를 재정의하기
착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런 판단으로 누가 득을 보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착하다고 평가한 사람에게 내가 이용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정해진 시스템을 존중하며 틀 안에서 움직일 때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공격적이라는 말은 어떨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편지로 기록하여 바깥에 알린 '에티의 편지'(1)가 있다. 유대인 막사의 심부름꾼으로 일하며 자기 가족들이 가스실로 옮겨지는 것까지 목격했고 이를 편지 속에 생생하게 담았다. 앤 율라노프 교수는 이에 대해 '나치보다 더한 공격성이 에티의 내면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했다. 공격성은 지켜야할 것을 지키고 소중한 것을 보호하고 정의롭지 않은 것에 맞서 싸우는 힘이다. 그걸 알게 된 후 내 안의 공격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여성성과 남성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성성, 남성성을 여성, 남성과 헷갈려서는 안된다. 융심리학에서 인간은 기본적으로 양성이며, 인간 내면에는 이 두가지가 모두 존재한다. 남성성은 태양처럼 선명하고 명징하고 강한 의지로 관철하는 힘이고, 여성성은 달처럼 은근하게 비치고 리드미컬하고 주기적이며 훨씬 유연하고 물과 같다. 동양의 음양사상이 남녀로 구분되지 않고 어느 가치가 우선하지 않는 것처럼 여성성, 남성성도 마찬가지다. 여성성, 남성성이 제대로 균형잡히면 정의로워야 할 자리에서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서 따뜻하고 친절하다. 자기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친절함과 자비심을 희생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다. 여성성이 발달하지 못한 남자들의 대표적인 경우는 분노조절이 안 되는 남자들이며, 남성성이 발달하지 못한 여자들의 대표적인 경우는 아무 결정도, 판단도 하지 못하는 여자들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양성적인 인간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4. 옛이야기를 통해 보는 여성의 통과의례와 자기실현
엄마의 딜레마는 무조건적인 돌봄과 양육이 어느 시점을 지나면 아이에게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성인이 되는 통과의례가 있어서 이 의식을 거치면 더 이상 부모의 아이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변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의례가 사라져서 '나의 아이가 아닌 시점'에 대해 의식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생의 통과의례는 기존의 삶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결혼은 남녀모두를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프시케와 에로스 신화에서 프시케가 어둠 속에서 남편을 만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그렇게 눈을 가려야만 결혼이 유지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
신화나 민담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추상화된 원형적인 존재들이다. 이야기 속 인물의 행동이 과장되고 병리적인 느낌이 드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야기가 오랜 세월동안 살아오며 엑기스만 남아있는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인 측면만 남아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옛이야기의 결말이 왕과 왕비가 되어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실제 인물들의 결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로열함이 발견되고 이들이 결합한다는 것이다. 내면의 남성, 여성은 불멸의 연인이며 이 둘의 신성한 결혼은 내 영혼과의 언약과도 같다.
대부분의 옛이야기들이 특정 시기에 필요한 이슈들을 하나씩 다루는데 여성의 일생전체를 다루는 이야기로 '손없는 처녀'가 있다. 어리석은 아버지 때문에 어렸을 때 손이 잘리고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왕을 만나 결혼하고, 다시 여러 곡절을 거쳐 재결합하는 이야기이다. 손은 내 삶과 주변을 더 나은 곳으로 창조적으로 만들어가는 도구이다. 손이 잘린다는 것은 이러한 능력이 억압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부장제가 여성들에게 주는 제일 큰 상처는 이렇게 손을 자르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시작하고 나중에는 왕으로 이어진다. 왕은 이미 없어진 손 대신 은손을 끼워주고 시종을 붙여주면서 '당신에게 손을 필요없다'는 메세지를 반복한다. 왕과 여주인공 둘 다 성장할 필요가 있으며 그래서 각각 7년간 고행을 거치게 된다. 여성들은 '당신에게 손은 필요없어'라는 목소리에 굉장히 약하다. '가장 창조적인 당신이 너무 멋있어!' 우린 이렇게 얘기해주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5. 시대가 주는 과제와 우리가 나아갈 길
코로나는 집단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를 견딜 힘이 없으면 해리가 일어나고 나에게서 나 자신이 떨어져 나가게 된다. 이 무거운 불안감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내가 에너지를 받는 곳, 나를 충만하고 안정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서 견뎌낼 수 밖에 없다. '진짜 힘을 받는 자리가 어디지?'라고 질문할 때 내 본연의 힘의 원천을 찾아 나에게 들어가게 된다. 파국, 위기를 뜻하는 카타스트로피라는 그리스 말은 본래 세상이 끝나는 시기에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깨어난다는 의미이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 각자 제대로 깨어나야 하는 때이다. 그냥 묻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숙제를 할 수 밖에 없는 시기이다. 도마복음에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면 그 드러낸 것이 자신을 구원한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드러내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은 것이 자신을 파괴한다.'라는 말이 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자기를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들, 잠재력을 개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이까지 황폐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을 만나는 가장 안전하고 쉬운 길 하나가 꿈하고 친해지는 것이다. 꿈은 내 무의식이 내가 깨어나 자기실현을 하도록 도와주려고 오늘 필요한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꿈은 굉장히 시적인 이미지로 우리 내면의 지혜의 전체 그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명상도 도움이 될 수 있으나 현재의 과제를 피해서 평정을 찾으려는 방법으로 쓴다면 추천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되면 아름다움이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건 누구를 따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나 자신이 되면 된다. 세상을 위하고 싶거든 자기 탐색을 열심히 하라. 내 안의 빛이 세상을 비출 것이다. 안을 충분히 탐색하면 바깥과 연결이 안될 수가 없다.
긴 추석연휴의 중간으로 강연 날짜를 잡으면서 혹시라도 참여가 너무 저조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정말 많은 분들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게다가 온라인 강연이었기에 물리적 거리의 제한없이 여러 곳에서 신청해주셨어요. 코로나가 주는 한계 속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옛이야기 속 여성성'이라는 좁은 주제에 이리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집중하고 계시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교수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내면의 힘을 바라보게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를 밀고 당기는 여러 힘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며 인류의 지혜라는 옛이야기 속에서 어떤 정답을 바라고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2시간의 강연을 듣고 우리가 얻은 것은 뾰족한 답이 아니라 묵직한 과제였습니다. 옛이야기 속 여성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문에 네 안에 그 모든 것이 있으니 '발견하라'는 현답이 내려진 셈입니다. 누군가의 길을 쫓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며 결국 내가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았네요.
누구나 '충만함의 결핍'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맛있는 음식이나 신나는 경험, 바쁜 일상으로 채워보려하지만 충분히 해결되지 않지요. 공허함을 일으키는 이러한 내면의 틈은 우리가 진정한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느끼는 거리감이 아닐까요. 옛이야기는 우리에게 삶에서 비켜갈 수 없는 과제를 마주할 힘을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선 인류가 오래오래 그러했듯이 우리도 그리고 앞으로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는 공통된 운명이, 혼자의 과제이되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줍니다. 강연에 참여해주신 많은 분들도 그 여정의 벗일테지요. 혼자가 아님을 실제로 확인한 듯 해서 든든해집니다.
내 안의 여성성과 남성성은 '고귀한 결합'을 통해 진정한 나를 잉태하고 출산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옛이야기처럼 내 삶의 서사가 온전해지도록 삶의 핸들을 꽉 잡아보아요.
* 강연에서 이야기되었던 자료와 강연 링크를 덧붙입니다.
(1) Etty Hillesum의 편지
https://jidewadg.home.xs4all.nl/j/divers/Interrupted%20Life/Interrupted%20Life_%20The%20Diaries,%201941-1943;%20and,%20Letters%20From%20Westerbork,%20An%20-%20Etty%20Hillesum.pdf
(2) 사이렌의 침묵과 노래 (여성주의 문화철학과 오디세이 신화)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772936
(3) 클래스 e 신화학자가 들려주는 옛이야기
https://classe.ebs.co.kr/classe/detail/134176
* 다음 번 [달빛오두막]은 10월 31일에 '동서양 옛이야기 비교'라는 주제로 '옛이야기 공부법'을 읽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번에 집중했던 프시케 신화를 우리나라 '구렁덩덩 신선비'와 비교하며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점과 지역이 만든 차이점을 함께 알아보겠습니다.
📍신청 : https://forms.gle/cmMjBjpiDGMEYuag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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